나라의 운명을 거룻배에 싣고

[태종 이방원 30] 음모와 배신

등록 2007.01.19 17:38수정 2007.01.2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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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일생 살아온 하정사 일행

바다에 빠진 하정사 일행은 지나는 어선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다. 목숨을 잃을뻔 한 해로는 두려웠다. 육로를 통하여 요동을 거쳐 개경에 돌아왔다. 지난해 10월 출발하여 4월에 돌아왔으니 6개월만이다. 이러한 일이 있어서 일까. 훗날 이방원은 배타는 것을 끔찍이 꺼려했다. 고소공포가 아니라 바다공포다.


하정사보다 1달 늦게 출발한 주청사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이번 금릉 행에서 이방원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제일 서글픈 일은 '대륙은 넓고 반도는 좁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끝없이 크고 고려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가 새삼스럽게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개인 이방원으로서는 난생처음 명나라 여행길에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배웠고 세상을 보는 눈을 떴다. 아울러 이색의 '친조외교'에서 외교와 정치가 무엇인지 터득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다. 이는 이방원의 생애에 자양분이 되었고 큰 영향을 미쳤다.

방원은 2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국에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생각은 달랐다. 원나라와 대륙의 패권을 놓고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명나라에게 '위화도회군' 이상의 선물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자가 있는 금릉을 예방했을 때 황제의 노여움을 사 처형되거나 투옥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방원의 기우였다.

물밑에서 전개되는 치열한 암투

문하시중 이색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없는 고려의 정국은 표면상 조용한 듯 보였으나 물밑에선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정중동(靜中動)이다. 이숭인, 정몽주를 비롯한 문신세력은 군부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암중모색을 강구했고 이색의 ‘친조외교’의 패착을 기회로 이용하려는 군부세력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썰렁하던 추동 이방원의 사랑채에 또다시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색을 기다리던 문신세력도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먼저 칼을 뽑았다. 오사충이 상소를 올려 이색을 탄핵하고 나섰다. 전열을 갖추지 못한 문신세력은 군부세력의 선공을 받아 와해됐다. 방어할 힘이 없는 이색은 장단으로 유배를 떠났다.

함창으로 이배되어 귀양살이하던 이색은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다. 집중호우로 감옥이 물에 잠기자 함창에 안치된 후 잠시 석방되었으나 또다시 금주로 추방. 여흥과 장흥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던 이색은 여강으로 이송 도중 사망했다. 쓰러져 가는 고려를 일으켜 세우려던 강직한 성품의 유학자 이색은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이색이 없는 고려는 군부세력의 독무대였다. 정몽주와 이숭인이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성계가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왕을 알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군신의 예가 무너진 것이다. 실록에는 왕의 특별한 배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군부세력의 위압감이 얼마나 극심했던 가를 미루어 짐작이 된다.

반란군 괴수를 처단하라

강화도에 유배당한 우왕은 황려부(여주)에 이배되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추수도 끝난 11월. 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여주에 김저와 정득후가 찾아왔다. 김저(金佇)는 최영의 조카이며 정득후(鄭得厚)는 최영의 심복이었다. 최영 실각 후 관직에서 쫓겨나 칼을 갈고 있던 옛 신하가 모시던 군주를 찾아온 것이다.

"문안 인사드립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문안은 핑계였고 우왕이 부른 것이었다.

"이성계를 처단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다면 눈을 감지 못하겠소."
"저희들 심정도 가납하여 주옵소서."
"예의판서 곽충보를 찾아가 이것을 전하고 짐의 뜻 을 전하시오."

우왕이 내놓은 것은 한 자루의 칼이었다. 누가 보아도 출처를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왕실 문양이 새겨진 보검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김저와 정득후는 서둘러 우왕의 배소를 나와 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개경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주에서 개경을 가려면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야 한다.

"어디로 건너지?"

난감했다. 이성계의 군졸들이 쫙 깔려있는 나루터를 왕실문양이 새겨진 칼을 가지고 건넌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가는 도중 발각되면 자신들의 목숨은 물론 우왕의 신변도 보장할 수 없었다. 수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여주 나루터에서 거룻배에 몸을 실은 일행은 남한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검단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물머리가 가까워졌다는 징표다.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만난 거룻배는 고려의 운명을 싣고 한강을 흘러내려갔다. 광진에 이르렀다.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을 이루던 큰 나루터다. 이제부터는 경강이다. 송파를 지나니 길목에 모레섬이 떠있다. 잠실섬이다.

조금 더 내려가니 부리섬이다. 북쪽을 바라보았다. 도봉산과 삼각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송악산아래 자리 잡은 개경 못지않은 도읍지 터라 생각되었다. 여의섬을 지나 양화진에 이르니 비릿한 갯내음이 밀려왔다. 조강 초입부에 들어선 것이다. 교하에서 임진강을 만나 조강 중심부에 이르렀다. 이제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개경이다.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던 일행은 해가 떨어지자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군선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하수상한 어지러운 세상인데도 당화(唐貨)는 유통되고 있었다. 명나라와 남방에서 온 밀화선(密貨船)이 야음을 틈타 움직이고 있었다.

당나라가 망한지 언제인데 당화(唐貨)인가. 우리나라에서 70년대까지 미제(美製), 또는 쩨(製)라면 사족을 못 쓸 때가 있었다. 중요 공산품은 물론 화장품과 스타킹 한 켤레, 심지어 과자와 껌까지 그랬다. 메이드인 유에스에이는 세계의 일류상품 브랜드였다. 문명을 꽃피웠던 당나라에서 들여온 상품은 이 땅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대륙에서 들여온 상품은 당화라 불리며 고관대작 부인들의 구매욕을 자극했다.

벽란도 미쳐 못 가 으슥한 강가에 거룻배를 댄 일행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보정문을 지나 탁타교(槖駝橋)를 건넜다. 곽충보의 집에 당도한 이들은 뒤를 돌아 보았다. 추적자는 없었다. 솟을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 이십니까?"
"전하께서 이 칼을 전하시며 이성계를 처단하라 하시었습니다."

칼을 받아든 곽충보는 흠짓 놀랐다. 칼에 새겨진 문양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고려왕실 문양이었다. 눈앞이 아찔하며 가슴이 쿵쾅거린다.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하게 칼을 받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거사에 성공하면 왕비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게 해주시겠다며 영화를 함께 누리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알았소이다."
"이번 팔관일에 거사하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거사를 약속했다. 김저와 정득후가 돌아간 다음 곽충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처신에 따라 고려의 운명과 자신의 생명이 좌우되는 갈림길에 서있기 때문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곽충보는 이튿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하다. 선지교를 건너는 말발굽 소리가 유난히 둔탁하다. 개경 십자로의 가조가(假造家)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가 찾아간 곳은 추동 이방원의 집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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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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