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에게 쫓겨다니는 말똥가리 신세

안양천 까치의 말똥가리 추격전

등록 2007.01.20 12:23수정 2007.01.2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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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양천 하류 전경

안양천 하류 전경 ⓒ 박정민

안양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 안양천은 광명을 지나고 서울 남서쪽 동네들을 흘러 월드컵공원 맞은편에서 한강에 합류합니다. 서울의 하천 여기저기에서 생태복원 사업이며 성과 이야기가 한창인 동안에도 안양천은 비교적 관심의 대상에서 멀리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안양천이라고 해서 아무 가망도 없이 썩은 물만 꾸준히 흘러왔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곳보다는 뒤처지더라도 꾸준히 수질개선과 생태계 복원을 위한 노력을 해왔으며, 그 결과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최근에는 천연기념물인 원앙 몇 쌍이 노니는 모습도 발견됐습니다.

a 말똥가리.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의 맹금류입니다.

말똥가리.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의 맹금류입니다. ⓒ 박정민

조류는 이른바 '환경지표종'으로 불립니다. 다양하고 많은 새가 있을수록 건강한 자연생태계로 보면 틀림이 없다고들 하지요(한두 종의 개체 수만 많은 것은 높이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맹금류의 존재감은 확실합니다.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있으니만큼 한 마리의 맹금류가 눈에 띈다는 것은 그만큼 수많은 하위구성원들이 주변에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BRI@말똥가리는 황조롱이 다음으로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맹금류입니다. 흔하다고는 했지만 한강변 녹지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어야 먼발치에서 한두 번쯤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텃새인 황조롱이와 달리 겨울철새이며 날개를 편 길이가 130cm 가량으로 과연 맹금류다운 체구와 인상을 자랑합니다.

기자는 최근 2~3년간 탄천, 밤섬, 월드컵공원, 북한산, 고덕동 둔치 등 서울의 다양한 생태계에서 말똥가리의 도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숨을 더 깊이 쉬는 것 같은 기분에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말똥가리에게도 도저히 어쩌지 못할 고충이 하나 있으니 바로 까치라는 존재입니다.

a 까치에게 쫓겨다니는 말똥가리.

까치에게 쫓겨다니는 말똥가리. ⓒ 박정민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유유히 나타나 한껏 폼을 잡으며 공중을 선회하던 말똥가리 주변으로 깍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까치 몇 마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다음부터는 볼 것도 없습니다. 치밀한 조직력으로 쉴 틈 없이 몰아붙이며 집단공격을 퍼붓는 까치떼에게 말똥가리는 반격의 기회 한 번 못 잡은 채 여지없이 패퇴하고 마는 것이죠.


낯선 분들에게는 마냥 신기한 장면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탐조가들에게는 TV 멜로드라마만큼이나 흔하고 식상한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니 공통점이 조금 더 있군요. 뻔히 다 알면서도 매번 혹시나 하며 안타깝게 지켜본다는 것, 하지만 결과는 늘 똑같다는 것.

a 계속 쫓겨다니는 말똥가리.

계속 쫓겨다니는 말똥가리. ⓒ 박정민

천하에 흔한 까치에게 눈길을 줄 리 없는 탐조가/생태사진가들은 이런 까치가 어지간히 밉살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이고, 맹금류의 먹잇감이 되는 작은 동물들에겐 까치가 양만춘 장군쯤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까치는 자기보다 작은 새들에게 텃세를 부리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맹금류라면 어림도 없습니다. 동네북인 황조롱이와 말똥가리는 물론 흰꼬리수리, 검독수리, 쇠부엉이까지 까치 눈엔 뵈는 게 없어 보입니다. 다른 동네에서 온 까치나 까마귀에겐 더 심하게 굽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단순명료한 이유인데, 모든 새들 중 가장 머리가 좋은 까치는 특유의 조직력으로 여지없이 적들을 무찔러버리고 맙니다. 같은 과인 까마귀도 습성이 거의 비슷합니다. 맹금류가 이들을 이기는 경우는 아직 한 번도 못 봤습니다.

a 아직도 쫓겨다니는 말똥가리.

아직도 쫓겨다니는 말똥가리. ⓒ 박정민

탐조가/생태사진가들은 매번 멍한 눈으로 쫓겨 가는 맹금류를 아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까치만 없어도 법적 보호종인 맹금류들이 훨씬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반생태적인 상상까지 해보기도 하지요.

하지만 반생태성은 둘째 치고 상상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 독한 인간들도 어쩌지 못하는 강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수원 주인들에게 잘 익은 과일을 콕콕 쪼아먹는 까치는 '철천지 원수'로 취급받고 있지만 정작 퇴치에 성공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녀석들의 머리가 좋고 적응력이 강한 탓이지요.

어쩌면 인간이 조성해 놓은 팍팍한 환경에 순진한 녀석들은 오롯이 피해를 입고, 영악하고 모진 녀석들만 끈질기게 살아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둑고양이, 바퀴벌레, 모기, 개미, 나아가 수퍼 박테리아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인간이 그렇게 되게끔 만들어놓고서 "왜 이렇게 끈질긴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과연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일 밖예요.

a 말똥가리는 쫓겨나고, 쫓아다니던 까치도 자러 가고, 오리들만이 평화롭게 이부자리를 펴고 있는 이른 저녁 안양천.

말똥가리는 쫓겨나고, 쫓아다니던 까치도 자러 가고, 오리들만이 평화롭게 이부자리를 펴고 있는 이른 저녁 안양천. ⓒ 박정민

그래도 쫓겨다니는 맹금류들이나마 자꾸 눈에 띈다는 데서 희망을 찾습니다. 서울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보아온 희귀조류만 해도 매, 장다리물떼새, 쇠부엉이, 흰날개해오라기 등 별 것이 다 있습니다. "어차피 이미 다 파괴됐다"고 포기할 단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에 대한 믿음에 기대어, 다음번에는 '對까치 대항전'에서 말똥가리의 선전을 기원해 봅니다. 아마도 승률은 희박하겠지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안양천 탐조에 관한 정보는 '하호'가 만든 서울 탐조안내 사이트 http://seoulbird.kfem.or.kr 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안양천 탐조에 관한 정보는 '하호'가 만든 서울 탐조안내 사이트 http://seoulbird.kfem.or.kr 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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