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 북내면 서원2리

골골마다 사람냄새 피어나는 음양이 명확한 마을

등록 2007.01.20 19:44수정 2007.01.2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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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고개 넘어 양동에서 서원리 가는길
서화고개 넘어 양동에서 서원리 가는길강수천
서원리 첫인상 - 컴퓨터게임 즐기는 어르신들

서원리 마을회관, 꽤 넓은 경로당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컴퓨터를 하고 계신 어르신들이었다. 산골 구석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두 대의 컴퓨터에 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우리나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리라.


노인회 김영기 총무가 컴퓨터를 가르쳤다고 한다. 다른 시골마을들과 달리 인터넷에 마을카페까지 있으며 30여명의 주민들과 출향민들이 카페에서 친목을 나누고 있다.

서원2리 서홰마을 전경 (사진 : 서원리 카페)
서원2리 서홰마을 전경 (사진 : 서원리 카페)여주포커스
서홰와 원골로 이루어진 서원리는 음양이 명확

서원리는 1리인 원골, 2리인 서홰와 산수골 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원주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원리로 이름 붙었다는 설과 옛날부터 원님이 쉬어가던 원(院)이 있던 원골(1895년 이전에는 지평현 상동면에 속함)이 상동(지금의 양동)에서 봤을 때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원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1895년에 지평현 상동면에서 여주군으로 편입된 서홰(서화)와 원골(원곡)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합쳐지면서 앞글자 한자씩을 따 서원리가 된 것이다. 그 중 2리에는 서화와 산수골을 합쳐 43가구 105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양동면 단석리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위치한 산수골에는 전원주택촌이 형성되어 있다.

서원리 역시 집성촌이었다. 박씨들이 터를 이루고 살다가 안씨 집성촌으로 변모, 또 한때는 서씨들의 집성촌이었지만 현재는 외지인들도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에피소드 한토막. 컴퓨터 앞에서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던 이동섭 노인회장은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난 외지인이라 많이 몰라!" 하시는 것이 아닌가. "몇년이나 되셨기에요?"하고 되묻자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다. "응 50년밖에 안됐어"


마을에는 다양한 명소들이 즐비했고 마을 전체가 산줄기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늘 양지바르다. 반면 도로 건너편은 산줄기의 북사면이라 늘 음지다. 서원2리의 명소들은 한 가지씩 특징이 있는데 모두 사람 냄새 폴폴 나는 이름과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산수골 산길 들머리
산수골 산길 들머리강수천
마을주민들의 지혜가 녹아든 아름다운 수퉁아구리


산길로 돌아흐르는 물길이 계곡을 건너는 수로
산길로 돌아흐르는 물길이 계곡을 건너는 수로강수천
박수만 이장, 서종훈 민예총지부장과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박이장이 산수골로 시집보냈다는 발바리 체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끝까지 일행을 따라다녔다.

골짜기 깊숙한 곳에는 다랭이논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곳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수퉁아구리부터 찾아보았다. 계곡의 물 일부를 자연스럽게 계곡 위쪽으로 흘러가도록 만들어 놓은 일종의 작은 물길인데 흥미로운 것은 물길이 계곡을 다리처럼 건너 다랭이논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이다. 자연친화형 수로라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산수골을 따라 산 기슭에 다다른 순간 널따란 갈대숲이 나왔다. 산막골이다. 박수만 이장은 그곳이 옛날 논과 밭자리였다고 설명했지만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갈대숲 너머에 나타난 통나무집을 만나는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산위에 산막이 있었던 것이다.

산막에는 소를 기르던 외양간까지 멀쩡하게 남아 있었으며 박 이장이 어렸을 때도 존재하던 산막이라니 최소한 35년은 넘은 셈이다. 하지만 산막을 이룬 통나무나 벽, 지붕 등은 너무도 멀쩡했다. 집은 비어있었지만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산막골 깊은 산중에 남아있는 통나무산막
산막골 깊은 산중에 남아있는 통나무산막강수천
참깨로 길을 포장하겠다고 큰소리치던 장자터의 부자 한주사

둥지봉을 돌아 동쪽 기슭으로 내려서면 장자터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서울의 모 대학교 소유의 대저택이 들어서 있는 이곳은 옛날 한주사라는 부자가 터 닦고 살던 곳이란다. 지금도 곳곳에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여주에 살고 있던 어느 부자가 자신은 서홰까지 쌀로 길을 닦으마고 호언장담을 했다. 이에 발끈한 한주사는 산수골 집앞에서부터 여주까지 참깨로 길을 닦겠다고 큰소리를 칠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서화마을에는 사기공장이 있던 '사기둥지'와 전란이 있을 때마다 피난처로 이용되었다는 '금정굴(도장굴)', 마을 아낙네가 덜렁덜렁 엉덩이를 흔들며 넘던 '더렝이' 등의 흥미로운 지명들이 남아 있다.

6.25전쟁당시 젊은 아낙이었을 한 할머니는 "미국놈이 오면 젊은 여자들을 덮친다고 해서 숨고, 인민군이 오면 또 숨고, 국군이 와도 또 숨고, 나중에는 중공군들이 솰라솰라 거리길래 또 숨었어"라며 입담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또 "굴속에 숨어 밥을 해먹을라치면 나중에는 머리가 어질어질 멀미가 나는거야. 연기가 꽉 차서 말이지"하며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산수골에 집이 한 채도 없던 15여년 전, 민예총 여주지부장인 물맘 서종훈 선생이 터를 잡고 물맘 갤러리를 열었다. 솟대와 장승,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물맘 갤러리에는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작업실 그리고 온갖 작품들이 가득했다.

산수골 초입의 물맘갤러리 입구, 물맘선생은 여주민예총 지부장이다
산수골 초입의 물맘갤러리 입구, 물맘선생은 여주민예총 지부장이다여주포커스

물맘갤러리 내부모습
물맘갤러리 내부모습강수천
제2영동고속국도가 지나갈 마을

산수유가 많이 핀다는 산수골은 예로부터 "물이 나도 명당인" 개구리터로 유명했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 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선조 무덤이 산수골에 있다고 하여 벌집 쑤시듯 무덤을 찾으려고 난리법석이었다고 하며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고 이규호씨도 서원리에 묻혀 있다고 한다.

마을 입구 도로 맞은편에는 장승거리와 선앙뎅이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만간 장승을 복원하여 세우고 마을축제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서원리는 2006년 10월에 서울보건대학과 자매결연을 했으며 농촌체험마을 신청도 해놓은 상태다. 마을주민들은 찾아오고 싶은 농촌마을을 만들겠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가슴 한 편에는 제2영동고속국도가 마을을 가를 것이라는 불안감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2006년, 서울보건대학과의 자매결연식 장면
2006년, 서울보건대학과의 자매결연식 장면여주포커스
서원리 가는길 : 북내면 소재지에서 용문방향 > 주암4거리에서 양동방향 고갯마루에 위치
단석리로 넘어가는 서화고개 우측에 묵밥이 맛있는 집이 있다.
서원리 인터넷카페 주소 http://cafe.daum.net/seowonlee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종신문 여주포커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세종신문 여주포커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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