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여잔 사회에서 유령 같은 존재지"

[서평] 일하는 여성들에 관한 만화 <이어달리기>

등록 2007.01.22 11:39수정 2007.01.2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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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친구에게 기혼자가 된 소감이 어떻냐고 물은 적이 있다. 친구는 딱 잘라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에서 완전 왕따야. 결혼한 여자는 이 사회에서 유령 같은 존재지."


당시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직장을 그만둔 것도 아니고, 왜 자기가 유령이라는 거지?

내 자신이 결혼을 하고 난 후에야, 나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게 새 가족이 하나 더 생겼을 뿐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고 예전과 같은 취향을 지녔으며 이전과 다름없는 사회활동을 하고 싶은데, 사회는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았다.

"어머, 이렇게 늦게까지 있어도 되요? 남편이 이해심이 넓은 사람인가 보다."
"뭐야, 아줌마 됐는데 빨리빨리 들어가야지. 얼른 집에가! 우리끼리 한 잔 더하고 갈테니까."
"신랑 밥은 차려주고 나왔어?"
"저녁땐데 신랑 밥해주러 들어가야 되지 않아?"


사람들은 나를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직장'이 끝나면 잽싸게 집에 들어가서 남편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남편에게 귀속된 존재쯤으로 생각했다. 누구도 우리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함께 밥을 해먹고 함께 설거지를 하는, 즉 모든 걸 분담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를 낳은 후,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제는 직장에 나가는 것마저 정당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어머, 애가 6개월인데 직장에 나오셨어요? 너무했다."
"태어난 후 3년까지는 그래도 엄마가 직접 키워야 되는데."
"돈도 좋지만 그래도 애 인성을 생각해야지, 그냥 눈 딱 감고 3년만 자기가 키워."
"애기 보고 싶지 않아? 나 같으면 눈에 아른거려서 회사 못 나올 거 같은데 아줌마 참 독하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나는 '전 단순히 돈 때문에 직장에 나가는 게 아닌데요'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내가 내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곧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그저 혼자 꾹꾹 안으로 삭였을 뿐.


그리고 나는 점점 '사회화'되어 갔다. 주위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일일이 반감을 갖는 것이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츰 이러한 사회인식에 빨리 동화되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빨리 적응하고 받아들여야 내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회의 통념에 한순간도 동화되지 못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내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싶다는 소망이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못하여 나는 결국 많은 이들과 수없이 갈등을 빚으며 줄기차게 살아왔다.

맞벌이 여성을 '유령' 취급하는 사회

여성과 일에 대한 열가지 이야기<이어달리기>
여성과 일에 대한 열가지 이야기<이어달리기>길찾기
<이어달리기>. 이 책을 열어젖히자, 나를 닮은 수많은 여성들이 좌르르 쏟아져 나왔다. 고정된 성역할 개념에 얽매여, 많은 부당함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여성들. 처음엔 무지하게 생활을 받아들이지만 차츰차츰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조금씩 눈을 떠가며 삶을 이어가는 강한 여성들의 모습.

열 개의 이야기 중 어느 한 이야기도 피상적이지 않았다. 임신으로 인해 부당해고 당한 여성, 비정규직 근로자, '캐디'라 불리는 특수고용 노동자, 한 부모 여성... 다양한 경우에 처한 여성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가 모두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았다.

"오늘처럼 아이가 한 번 아프기라도 하면 못 나가고 늦게 나가고 야근 못하고. 그럼 밉보이죠. 게다가 나처럼 집안 먹여 살려야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전히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보조적으로 돈 버는 거라는 생각이 강해서 회사가 조금만 어려워지면 여자들부터 자르죠."

통계에 따르면 여성이 가장인 세대가 전체 세대의 25%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리고 맞벌이하는 가정은 거의 50%대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장=남자'라는 통념에 못 박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TV를 켜면 늘 회사일에 지쳐 돌아온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여자가 등장할 뿐이다. 50%에 이르는 맞벌이 여성들이 존재하지만 사회는 그런 여성들을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 유령인 것이다. 아이 둘을 먹여 살려야 하는 한부모 여성이 TV에서 나오는 '아빠, 힘내세요' 송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왜 우리 사회는 늘 아빠만 힘내라고 노래할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어달리기>의 강점은 일단 재미있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책들은 대부분 너무 지루하거나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 책은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책을 덮을 때쯤 되면 평소 흔하게 보아왔던, 그러나 사실은 보이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수많은 유령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대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일용직 여성들, 다른 이의 아이를 돌보아주는 '아줌마'들, 그리고 이기적인 노동운동의 일부분쯤으로 여겨졌던 KTX 여승무원들.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시 여기고 지나갔던 많은 이들의 삶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그 아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 혹시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과장되었다고 느끼는가? '에이,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러고 살아?'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둘 중의 하나이다. 남자이거나, 아니면 선택받은 소수에 속하는 여자이거나.

그러나 어떤 경우라고 해도 책의 끝장까지 읽어가다 보면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 내 사고가 한정되어 있었던 것임을. 다른 이의 아이를 돌보아주는 아줌마의 삶이나 KTX 여승무원들의 삶에 대해서 한 번도 관심 있게 들여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과장되게 느껴졌던 것임을.

그리고 그렇게 느낄 때쯤이면, 당신도 이미 함께 가는 긴 여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남, 녀, 노, 소, 인종, 장애와 같은 선천적 요인으로 의해 더 이상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이어달리기

장차현실 외 지음,
이미지프레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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