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 마술사, 삼월의 나라를 만들다

[신간] 온다 리쿠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등록 2007.01.25 11:11수정 2007.01.2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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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북폴리오
2월의 마지막 날, 미즈노 리세는 온통 습지로 둘러싸인 '파란 언덕'에 있는 고급 기숙학교로 전학 온다. '삼월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 기숙학교는 부유한 집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학생들은 두 명이 한 방을 사용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과목을 훌륭한 선생님한테 배울 수 있다. 특정과목에 관심이 있거나 소질이 있는 학생이라면 이 학교는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학교의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음울하고 어둡다. 습지로 둘러싸인 환경 때문일 수도 있고, 오래전부터 이 학교에 전해오는 기괴한 전설 때문일 수도 있다. 미즈노 리세가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학교에서는 기이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

굳이 기숙학교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학교에 관한 기억을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분 좋은 추억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지난 시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개성과 가정환경, 성격을 가진 학생들 수백 명이 한곳에 모여있는 장소, 학교. 호러나 미스터리 소설의 무대로 이보다 더 적당한 장소는 없을지도 모른다.

온다 리쿠의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이런 학교를 무대로 한 소설이다. 고딕의 전통을 따른 서스펜스라고 보면 적당할까?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다. 이 장소는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곳이고, 외부와 연락할 수도 없고 교장의 허락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해서 이 학교의 환경도 음울하기만 하다. 거인의 손가락 같은 탑 네 개가 우뚝 서 있고, 그 탑의 창을 바람이 통과하는 소리는 마치 여인의 히스테릭한 웃음소리처럼 기괴하다. 학교의 주변은 온통 습지다. 대낮에도 우중충한 그 습지를 보고 있자면, 조금 전까지 웃던 사람도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BRI@<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작가의 전작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서 파생된 작품이라고 보아도 좋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부에 등장하는 작은 이야기를 확장시킨 버전이다. 하지만 진행되는 방식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결말이 완전히 다르다. 여성 작가답게 환경과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작품의 구석구석에서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다. 기괴한 공포 분위기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분위기가 내내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10대의 남녀 학생들이 모여있는 기숙학교'라는 장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도 펼쳐진다. 밝은 햇살 아래 모여서 웃는 학생들, 축제 기간에 펼쳐지는 들뜬 기분과 화려한 무도회, 커다란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읽는 학생들, 맛있는 음식을 왁자지껄하게 먹는 식당의 분위기.

온다 리쿠는 이런 모습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밝은 부분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마치 학원을 무대로 한 청춘 소설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화려함 뒤에는 알 수 없는 무거운 앙금이 있다.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의 사연은 모두 제각각이다. 누구는 음악이 좋아서 열심히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들어왔고, 누구는 부모의 특권의식 때문에 강제로 들어왔다. 또 누구는 자식을 보기 싫어하는 돈 많은 부모에 의해서 이 학교에 버려졌다.


이 학생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과거와 가정환경을 숨긴다는 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을 모른 척한다는 점, 그리고 친한 척하면서도 서로서로 경계한다는 점이다. 미스터리 소설의 무대와 등장인물로 꽤 적절한 상황 설정이다.

주인공인 미즈노 리세는 2월의 마지막 날 이런 학교에 툭 던져진다. 이때부터 그녀의 주변에서 (또는 그녀를 중심으로) 이상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고, 주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사건에 휩쓸리게 된다.

학교의 배경이나 인물들의 모습에서 어딘가 모르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난다. 하지만 이건 작가인 온다 리쿠만의 장점일 것이다. 온다 리쿠는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영역을 뒤섞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작가의 작품세계는 미스터리, 판타지, 호러, SF 등을 모두 넘나들고 있다.

전작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역시 특유의 작풍(作風)을 선보이고 있다. 습지로 둘러싸인 언덕은 왠지 판타지의 무대 같고, 의문의 연속 사건들은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개성강한 주인공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마치 성장소설의 한 장면 같고, 한밤중에 일어나는 사건의 묘사는 흡사 공포영화를 보는 듯하다.

온다 리쿠는 일본에서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작가이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서 그 노스탤지어의 대상은 학교다. 물론 그 학교에서 풍기는 느낌은 여러 가지다. 성인이 되기 전 휴식기로서의 학교, 청춘 남녀가 모여서 사랑과 우정을 만들어가는 공간인 학교 그리고 어두운 전설이 내려오는 음울한 장소인 학교. 온다 리쿠는 이 작품을 통해서 학교가 가지고 있는 온갖 이미지들을 한데 뒤섞고 있는 것이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그 자체로 완결된 소설이지만, 주인공인 미즈노 리세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온다 리쿠는 이후에 발표하는 <황혼의 백합의 뼈>에서 고등학생이 된 미즈노 리세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독자들은 즐거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온다 리쿠 지음 /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펴냄.

덧붙이는 글 온다 리쿠 지음 /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펴냄.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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