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푸른 하늘은 뭔가?

[서평] 이시영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

등록 2007.01.25 11:50수정 2007.01.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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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시영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솔출판사,1997)

이시영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솔출판사,1997) ⓒ 솔출판사

1997년 도서출판 솔에서 나온 <조용한 푸른 하늘>은 이시영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이다. 지금까지 펴낸 시집의 양과 그가 이룩한 시적 성취면에서 이시영은 우리나라의 중견 시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첫 시집<만월>(창작과비평사, 1976)에서부터 줄기차게 70,80년대 폭압적 정치 상황 하에서 늘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을 노래해 온 리얼리즘 시인이다. 그의 시는 70, 80년대의 이른바 민중시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90년대에 들어 자주 비판당해 온 민중을 선전 선동했던 그 투쟁시, 슬로건시와는 처음부터 달랐다.

그의 시는 시대의 아픔을 애써 외면한 채 시적 기교에 지나치게 치중하지도 않았고, 민주주의 회복과 노동해방이라는 당면한 현실 문제 해결에 성급한 나머지 문학적 형상화라는 그물을 멀찍이 벗어난 엉터리시도 아니었다. 소외받고 억압당해 온 민중들의 삶, 그들의 고통과 투쟁, 사랑을 시의 중심 내용으로 삼으면서도 시의 진로를 벗어남이 없는 팽팽한 시적 긴장을 가진 완성된 시 형식을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정님이', '후꾸다' 등이 예의 작품들이다.


이시영의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을 펼쳐보면 병든 시대에 우리를 다시 살아 숨쉬게 할 깨끗한 산소가 가득 쏟아져 나온다. 인간의 유전자로 새끼 양을 복제하는 시대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은 한마디로 '죽임'의 시대다. 무한질주의 속도만이 추구되고, 그 모든 것이 숫자(가격)로 체크, 평가되는 상품, 상품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도시 문명은 분명 비인간화, 죽임의 시대라 불려도 마땅하다.

그의 시 '상품, 상품', '홀리데이 인 서울', '회식', '자본주의' 등에는 타락한 현재의 사회적 삶이 가감 없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우리 시대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고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의 어떤 메시지도 남겨놓지 않고 그저 우리들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시에 표현된 어투를 빌려 우리 시대를 다시 말하자면 납빛 하늘 밑에서 공허의 흰 피를 먹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살아가는 절망의 시대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시영의 새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을 천천히 정독하면 다시 살아날 것 같은 新生의 힘을 얻을 수 있어 기쁘다.

심심했던지 재두루미가 후다닥 튀어올라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그 옆의 콩꼬투리가 배시시 웃다가 그만
잘 여문 콩알을 우수수 쏟아놓는다
그 밑의 미꾸라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봇도랑에 하얀 배를 마구 내놓고 통통거린다
먼길을 가던 농부가 자기 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시월' 전문(69면).


위 시에는 생명의 꿈틀거림이 생생(生生) 드러난다. 꿈틀거리다 못해 종이 표면 위로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푸른 가을 하늘로 유명한 우리나라 시월의 금가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다. 우선 위 시에서 드러나는 내용상의 특징은 등장하는 시의 소재인 각 사물들이 각(角)지거나 끊어짐이 없이 모두가 사랑의 숨결 하나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날짐승 재두루미와 땅 위의 콩꼬투리, 물 속의 미꾸라지, 길 위의 농부가 완벽하게 하나의 모습으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생명체 우주의 평화스런 본래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시집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휘가 바로 '푸르다'의 형용어와 '하늘'이라는 단어이다. 말할 것도 없이 '푸르다'라는 시각적 이미지는 보통 살아 있는 생명력이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일 터이고, '하늘'은 앞의 푸른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공간의 확장을 통한 우주나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고귀한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닥치는 대로 소비하고 마구 내다버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삶의 터전인 세계를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드는 20세기말 산업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시영의 시는 생명의 "강한 전류와 뜨거운 불꽃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의 시집을 펼쳐보면 곳곳에서 이러한 생명의 숨소리가 용솟음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아무렇게나 펼쳐본 아래의 시들에서 그것은 확연히 느껴진다.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먼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 '화살' 전문(25면).

겨울 나무의 찬 가지 위로 올해의 가장
매서운 눈보라가 휩쓸고 지나가자
땅속의 앞 못 보는 애벌레들이 제일 먼저 알고
발그레한 하품을 한다 - '新生' 전문(49면).

건재상에 팔려와 기다리는 모래 속에는
거이의 발자국과 새 발자국과
어느 맑은 여름 낮의 천둥 소리와
서서 닿지 못하는 먼바다의 신음 소리와 - '水墨' 전문(64면).

푸른 하늘에서 밤톨 하나가 툭 떨어져 팽그르르 돈다
오양간의 송아지란 놈이 슬픈 앞발을 들고
맨 처음 그것을 치어다본다 - '凋落' 전문(66면).

@BRI@인용한 시 모두 그 길이가 3~5행으로 유난히 짧은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극도의 절제된 시어의 운용과 팽팽한 시적 긴장이 빚어놓은 빼어난 단형의 서정시다. 우주의 어느 한 모습과 순간을 시인의 예리한 직관력으로 움켜잡아 대우주의 숨결을 그대로 살려내고 있는, "짧은 시어와 행간의 울림으로써 더 깊고 많은 뜻을 전"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적 전략이 맘껏 발휘된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위 시들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자질구레한 생활이 구체적으로 그려졌더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자연 현상만을 그리든지 그것으로 인간 사회와 우주의 어떤 모습을 그린 시들, 그것도 고도의 압축과 생략을 통한 여백으로 나타내고 있는 시의 내용은 아무래도 관념적으로 기울어지기가 쉽다.

그런데 '석양녘'과'당숙모'라는 시는 참 재미있는 작품이다.

가을이 깊어가자 수수는 작 익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산두밭 사잇길로 무거운 쟁기를 끌고 오던 소리가 갑자기 뒷발질로 송아지 뱃구레를 지른다. 매애 하고 수수밭 속으로 뛰어든 송아지가 와삭와삭 수숫대를 훔치다 말고 놀란 눈으로 미끈한 하늘에 불끈 솟는 피비린 노을 기둥을 본다. - '석양녘' 전문(14면).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되똥되똥 걸어와 후닥 헛간 볏짚 위에 오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사이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알을 낳는다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다시 일 나간다 - '당숙모' 전문(48면).



인용한 두 편의 시 모두가 인간이 아니라 소와 닭이라는 짐승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 생활의 온기와 사람 냄새가 나는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먼저 '석양녘'을 보자. 깊어가는 가을 산일을 마치고 무거운 쟁기를 끌며 돌아오는 어미소, 수수밭 옆을 지나자 갑자기 뒷발로 자기 새끼 뱃구레를 질러 수수밭에 몰아넣어 주린 배를 채우게 한다. 동물과 사람의 구분 없이 새끼를 둔 세상의 모든 어미의 마음은 한 가지가 아닐까. 길이가 좀 짧기는 하지만 이 산문시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필자의 시선을 끌고 있는 시어는 '놀란 눈'이다.

남의 곡식밭에서 훔쳐 먹다 누군가 보고 있는 듯해 깜짝 놀란 표정의 송아지 눈은 참으로 생기가 넘쳐 보인다. 갓 돌을 넘긴 필자의 아들놈의 커다란 두 눈처럼 친애감이 간다. 석양녘 노을 기둥은 송아지의 눈을 놀라게 한 것이면서도 '놀란 눈'이 시각적으로 선명히 두드러지게 만든 상황의 바탕색이다. 위 시는 이렇게 석양녘 깊은 가을 산의 한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이 풍경화를 값지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림 속에 선명히 살아있는 송아지의 그 놀란 눈을 그려 넣은 점경(點景)의 효과로 가능한 것이다.

시 '당숙모'는 시인이 독자의 상상력을 한 치의 옆도 돌아보지 못하도록 견고하게 붙들어 매어 강한 전류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작품이다. 위 시는 닭의 행위를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당숙모의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놓게 만들고 있다. 시골에서 자란 필자는 위 시를 처음 읽으면서 군소리를 종종하시면서도 억척같이 살아오신 고향 당숙모가 자연스레 떠올라 입가에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들일을 나갔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때문에 얼른 집에 들어와 비 설거지(마당이나 지붕에 말리려고 내다놓은 고추 등을 치우는 것)를 얼른 하고서 다시 들일나가시는 당숙모, 일 나가시며 어디에서 놀고 있을 아들놈, 서방 욕을 구시렁대며 당숙모의 삶과 위 시가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까? 깊은 시적 성찰로 숨김과 드러냄의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 작품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을 듯한 닭과 당숙모의 비유적 결합을 훌륭히 이뤄내고 있는 이것을 보면 시인의 탁월한 시적 재능을 짐작케 한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강철 같은 투시력으로 생명력 넘치는 한 순간을 붙잡아 그림같이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짧은 시가 좀더 인간적인 사람 냄새나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계속 남는다.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합니다.

조용한 푸른 하늘

이시영 지음,
책만드는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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