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태인, '객가'를 아시나요?

[해외리포트] 17세기 북방에서 이주... 수많은 명망가 배출

등록 2007.01.27 10:36수정 2007.07.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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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각 지역의 전통건축물이 줄지어 들어서있는 듯한 뤄따이 객가촌. ⓒ 모종혁

그 곳은 또 다른 사회였다. 그 곳 사람들은 1억 쓰촨(四川)인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이었다. 그 곳의 문화와 풍습은 중국 내륙의 거대 성인 쓰촨과는 이질적인 화남 지방의 풍취가 짙게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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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수도인 청두에서 서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소도시 뤄따이(洛帶). 마을 입구를 육중하게 막고 서있는 석패방을 가로질러 들어서면 음률이 강하고 흐트러지는 듯한 쓰촨방언과 다른 언어를 접하게 된다.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도 아니고 외국어나 다름없는 광둥어도 아니며, 마오쩌둥의 거센 말투가 떠오르는 후난어도 아닌 색다른 언어, 바로 객가(客家, Hakka)어다.

뤄따이, 그 곳은 객가인의 마을이다. 4세기 유비와 제갈량이 세운 촉한의 후주인 유선이 지방 순시를 마치고 청두로 되돌아가다가 뤄따이의 한 우물에 옥대를 떨어뜨려 이름이 지어진 마을. 본래 뤄따이는 쓰촨 원주민들이 살던 작은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던 뤄따이가 오늘날 중국 서부지역 최대의 객가촌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7세기. 명말청초의 전란과 수십 년간 중국을 휩쓴 홍수·가뭄의 재난을 피해 화남지역에 살던 객가들이 쓰촨으로 흘러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적게는 예닐곱 명의 한 가족에서, 많게는 수십, 수백 명의 친족과 마을 단위로 쓰촨에 들어와 객가인들은 곳곳에 자신들의 공동체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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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따이 광둥(廣東)회관 내에 모셔진 객가혼 석비. 2001년 뤄따이에서 열린 '국제객가학술회의'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다. ⓒ 모종혁

"우리가 진짜 중국인의 후예"

홍수전, 쑨원, 송칭링, 주더, 덩샤오핑, 천이, 예젠잉, 후야오방, 궈모뤄 등 중국 근현대사를 주름잡은 풍운아 및 혁명가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리카싱 홍콩 장강실업 회장, 탁신 치나왓 전 태국 총리 등 동아시아 지도자 및 부자들.

이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중국인이거나 중국인의 혈통을 잇는 화교라는 것, 둘째는 동방의 유태인이라 불리는 객가의 후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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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러산(樂山)시에 있는 궈모뤄(郭沫若) 동상. 중국 학계의 석학이자 문학가였던 궈모뤄도 객가 후예였다. ⓒ 모종혁

객가, 그들은 원래 중국 휘허(淮河) 이북, 황허(黃河) 중하류지방에 거주했던 한족들이었다. 자신들을 중국인 속의 진짜배기 화인(華人)이라 부르는 객가는 후한 및 삼국시대의 전란기를 피해 남부지역으로 남하해 오면서 형성된 혈연과 지연의 공동체를 통칭한다. 3, 4세기부터 13, 14세기까지 천여년 동안 북부지방에 살던 지금의 객가는 장시성, 푸젠성, 광둥성, 광시자치구, 후베이성, 후난성 등지로 같은 성씨의 친족이나 이전에 살던 마을 단위로 이주하였다.

춥고 척박한 북방에서 살던 객가인들은 금방 남방의 따뜻한 기후와 기름진 농토에 매료되었다. 기원 이전만 하더라도 북방 한족에 의해 오랑캐의 땅이라 불렸던 중국 남방지방은 이질적인 남방 원주민과 소수민족의 터전이었다.

북방에서 내려왔던 객가인들은 외래문화의 대지 위에서도 본래의 고유문화와 풍습을 고집스레 유지하여 오늘날 독특한 객가 문화를 이어 내려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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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따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녔던 광둥성 출신들이 세운 동향회관. ⓒ 모종혁

객가어는 고대 중국 북방지방의 한족어

뤄따이의 거리를 거닐다보면 자신들만의 고유문화를 지켜온 객가인들의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담하고 선을 날카로운 쓰촨식 건축물과 전혀 다른 광둥식, 후난식, 장시식 건축물과 민가들은 중국 각지의 건축물을 한데 모은 박물관 같다. 고추와 화자오(花椒)를 넣어 맵고 얼얼한 쓰촨요리와 달리 기름지면서 짜지않고 화려한 북방과 남방지방 요리는 쓰촨 내에서는 객가촌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이다.

객가인이 다른 한족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언어와 풍속이다. 혼란기를 피해 친족과 마을 단위로 이주를 하고 독자적인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다보니, 객가어는 고대 중국 북방지방의 한어(漢語)가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4세기 지금의 허난성에서 남방으로 내려와 43대째 객가 자손인 우자윈(53)씨는 "객가어는 소수민족의 말투나 외래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중국어"라고 단언했다. 천여년 동안 살던 장시성에서 가뭄을 피해 17세기 후난을 거쳐 쓰촨으로 이주해온 우(巫)씨 가문은 뤄따이에서도 초창기에 정착한 객가가문이다.

우씨는 "쓰촨에 들어온 뒤 쓰촨문화와 쓰촨어를 익혔지만 지금도 조상대대로 내려져온 언어와 문화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면서 "전통문화를 철저히 파괴한 문화대혁명 속에서도 객가인들은 객가만의 전통과 조상봉양, 세시풍속, 자녀교육 등은 꾸준히 지켜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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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따이 우(巫)씨 가문 본당 안에 모셔져 있는 조상 제단. 객가인 집안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모종혁

전통은 지키면서 타문화를 포용, 발전하는 객가인

@BRI@오랫동안 쓰촨성의 객가인들을 연구한 천스송 쓰촨성사회과학원 부원장은 자신의 저서 <쓰촨객가>에서 "쓰촨의 객가인들은 고립된 지리환경 속에서도 선진 농업기술을 보급하고 감각적인 상업마인드로 단기간 내에 성공한 외래인들"이라며 "'조상의 땅은 팔 수 있어도 조상이 물려준 언어는 버릴 수 없다'(能賣祖田,不能賣宗言)는 강한 정체성은 객가인이 성공한 원동력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빈곤한 농촌마을이었던 뤄따이에 정착한 객가인들은 떠나온 출신지에 따라 장시, 광둥, 후광 등 동향회관을 건설하고, 뤄따이를 쓰촨성 수도인 청두만큼 잘 사는 상업도시로 발전시켰다. 쓰촨 출신 객가 혁명가인 주더, 덩샤오핑, 천이 등은 중국 공산혁명을 완수하고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을 현대화시켰다. 궈모뤄, 한쑤인, 리종우 등 쓰촨 출신 객가 문예인들은 중국 문화예술을 풍성케 했다.

중국 대륙에만 6500만, 홍콩, 타이완, 마카오 등지에 1500만명, 전세계 80여개국에 3500만명 등 1억이 넘는 객가인들의 '객가 커뮤니티'(Hakka Syndicate)가 번성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전통만을 고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비록 객가인들은 국적과 이데올로기를 떠나 객가만의 정체성 아래 뭉치기도 했지만, 타민족 및 이방인과의 교류도 적극적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들이 속한 지역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공동이익과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객가인들의 또다른 특징이다.

오늘날 세계화의 깃발 아래 전세계 곳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한민족이 객가인들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것, 우리 겨레의 전통과 문화는 지켜나가면서 타민족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고 인류 공동의 가치 아래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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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식 건축물과 전혀 다른 양식을 보여주는 뤄따이의 후광(湖廣)회관. ⓒ 모종혁

#객가 #뤄땅이 #쓰촨성 #객가인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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