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卿) 등과 함께 왕실에 협력하였는데도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들의 진정이 용납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내가 마땅히 동쪽으로 돌아가서 이를 피하겠다." - <태조실록>
혁명피로감일까. 이성계의 폭탄선언이 터졌다. 군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길로 매진하던 이성계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권력도 싫고 영화도 싫으니 개경을 떠나 함주로 낙향하겠다는 것이다.
회군세력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선장을 잃고 난파한다면 전복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밀려왔다. 여기서 멈춘다면 피의 보복이 따르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팽배했다. 이성계 진영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정도전, 남은, 조인옥 등이 참석한 긴급참모회의가 열렸다. 방원도 물론 참석했다.
"공(公)의 몸은 종사와 백성이 매여 있으니 어찌 그 거취를 경솔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실을 도와 불초한 사람을 물리쳐서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렇게 하면 참소하는 말이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지금 만약 물러가 있게 된다면 참소하는 말이 더욱 불처럼 일어나서 화(禍)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 <태조실록>
정도전이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의 격론을 엿듣고 있던 가신(家臣) 김지경이 이성계의 제2부인 강씨에게 왜곡하여 고해 바쳤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공(公)에게 권고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일이 장차 그릇될 것입니다. 이들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강씨가 발끈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시골로 돌아가잔 말인가. 함주로 낙향하기 위하여 회군했단 말인가? 당치도 않는 말이다. 강씨는 비록 여자인지만 야심만만한 여장부다.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한 강씨가 이방원을 찾았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믿을 수가 없소."
불같은 성미다. 전후 사정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 모두 자르자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참소하는 말에 시달려 물러가시려 하나 정도전과 남은 등은 가시는 것을 중지시킨 사람입니다."
방원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김지경에게 책망의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님과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한 사람이니 너는 다시 말하지 마라."
어느덧 방원은 교통정리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많이 컸다. 서모를 다독이고 가신을 나무라는 지위에 올라 선 것이다. 그의 나이 이제 20대 중반.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장가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많이 성장한 것이다.
불확실한 정보 믿어야 하나
참모들의 간곡한 만류에 이성계는 낙향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이 이성계 부부를 궁궐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지난 7월. 초대받은 공양왕이 이성계의 사저에 거동하여 연회를 대접받은 것에 대한 답례다. 초대를 접한 방원은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보를 다루는 자의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이 무렵. 방원의 안테나에 모종의 음모가 포착되었다. 이성계를 궁궐로 유인하여 도모하려는 한다는 첩보였다. 하지만 정보 제공자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순도 미달의 불확실한 정보였다. 또 다시 의견이 분분했다. 참석하자는 파와 모종의 흑막이 있는 것 같으니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의아스러운 점은 없지 않으나 초대를 거절할 명분이 없습니다. 참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전이 찬성하고 나섰다. 정면 돌파하자는 것이다.
"명분은 만들면 됩니다.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안전을 중시하는 남은이 반대했다.
"무슨 말씀들을 하고 계시는 게요. 당치도 않는 말씀들 이십니다. 계란을 지고 산 밑을 지나지 못한다면 어찌 산을 오른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장군님을 모시고 입궁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씨의 의지는 단호했다. '산이 무너져 계란이 깨질까봐 산을 피한다는 것은 졸장부들이나 하는 짓이지 않느냐'며 사나이들의 기(氣)를 자극하는 모멸스러운 힐난이다. 둘러앉은 사나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만 껌뻑거렸다. 격론을 벌이던 이성계 진영은 궁궐 주변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연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방원도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다. 일찍이 정5품 전리정랑 직에 출사하여 정2품 밀직대언(密直代言)에 올랐지만 군신관계로 입궁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이성계가 가는 곳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일급 수행원이었다.
위기를 탈출하라
대궐의 연회는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살얼음판이었다. 이성계가 강씨와 더불어 공양왕에게 나아가 술잔을 올리니, 공양왕이 태조에게 의대(衣襨), 입자(笠子)와 보영(寶纓) 그리고 안장을 갖춘 말(鞍馬)을 하사했다. 이성계는 즉석에서 의대를 갖춰 입고 절(拜謝)을 하며 예를 올렸다. 연회가 무르익어갔다.
밤이 이슥해지자 유만수(柳曼殊)가 대전 문을 닫고 열쇄를 걸었다. 방원은 깜짝 놀랐다. 뭔가 위해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신빙성이 없던 첩보가 사실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방원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님,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빨리 궁궐을 빠져 나가야 하겠습니다."
방원이 이성계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위기를 알렸다. 상황을 판단한 이성계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연회장을 빠져나온 이성계가 대전의 열쇠를 담당하는 담당관에게 명했다.
"문을 열어라."
열쇄 담당관(金直)이 우물쭈물했다.
"뭐하는 게냐. 문을 열라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벽력같은 이성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마침내 열쇠 담당관이 문을 열었다. 궁궐을 빠져나온 이성계는 마상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방원에게 말했다.
"갓끈은 실로 진귀한 물품인데, 내가 장차 너에게 이것을 전해 주려고 한다."
방원의 순발력을 치하하는 말이다. 위기를 모면한 이성계 부자는 선죽교를 건너 안전하게 귀가했다. 이튿날. 공양왕은 문을 열어준 열쇄 담당관(金直)을 옥에 가두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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