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킬러리스트>랜덤하우스
<킬러리스트> 첫 장의 제목은 '살인지도'이다. 치밀하고 정교한 살인의 풍경이 지나가고 나면 등장하는 것은 빨치산에 가담한 일본군의 첩자 유키히메(한국이름: 설희)이다.
장이 바뀔 때마다 화자를 달리하여 엉뚱한 세계가 펼쳐지고, 이 엉뚱한 이야기들이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할 때쯤이면 모든 이야기들이 어떻게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자각할 때쯤이면 이야기는 무서운 스피드를 가지고 진행되다가 한순간 절정에 이른다. 책을 닫을 때쯤이면 독자들은 하강이 없는 결말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여러 가지 영상이 스쳐 지나간다. 어떻게 보면 <남부군> 같이 지루한 역사 영화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더블 크라임> 같은 정교한 범죄스릴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고도의 정신분석서이다. 정신분석에 정통한 의사의 기나긴 논문을 한 편 읽은 듯한 난해함. 그리고 난해한 책을 읽은 후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인 허탈함. 그러나 가장 강한 느낌은 인류라는 종족에 대해 슬며시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부끄러움이다. 우리네 인류는, 어쩌면 그렇게도 잔인한 짓을 많이 했던가.
작가가 묘사하는 죽음의 장면은 한국 현대사 최고의 비극들에 모두 합치될 수 있다.
...여자들의 유방을 도려내어 죽이고, 아이들은 토막 내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데. 임산부의 배를 갈랐고...
이 묘사는 1) 광주학살, 2) 베트남전에서 학살당한 양민들, 3)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한국민(중국인)의 시체 모두에 해당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사건 모두가 한국 현대사에 굵직굵직한 선을 그었던 대형비극이었고, 그 비극의 여파는 지금도 여전하다. 다만 한국인들이 그것을 느끼고 있지 못할 뿐.
@BRI@작가는 그러한 현대사의 비극들을 모르고 지나가는, 아니 어쩌면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고 있는 우리들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비극적인 현대사들과 본격적인 정신분석이 만나서 빚어내는 이야기들은 거의 '현란함'에 가까운 수준이다.
쉽게 읽혀지는 짜릿한 스릴러물을 상상하는 독자라면 섣불리 이 책을 펼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사실 처음부터 극소수 독자들을 상정하고 쓴 책이라고 보아야 한다. 빨치산과 일본군, 베트남전에 참가한 늙은 아버지의 얘기가 길게 펼쳐지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될까.
작가가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기를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책에 등장하는 정신분석은 추리소설의 재미를 위해서 살짝 가미된 그런 농도의 정신분석이 아니다. 나중에는 도표와 순서도까지 나와서 도대체 이 책이 의학서인지, 소설책인지 아리송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난해한 소설을 힘겹게 읽고 나서도, 작가가 보내려고 한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작가는 전쟁에서 나타나는, 혹은 권력에 대한 독점욕에서 파생되는 인류의 잔인한 행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토록 치밀한 연쇄살인범을 만들어냈을까. 역사 속의 범죄가 제대로 단죄받지 못했으므로, 소설 속에서나마 그들에게 단죄를 내리고 싶었던 것일까.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지 못한 작가의 역사적 진정성이 고스란히 과제로 남는다.
결국 이 책은 극소수의 독자를 가정하고 쓴 책이다. 정신분석 쪽에 조예가 깊은 의학 쪽 인사라거나, 전쟁관련 책이라면 무조건 읽는 사람. 혹은 작가 노희준의 오리지날 팬. 아니면 문학전문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혹시 작가는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는 가정하에 쓴 것은 아닐까. 잊혀 가는 역사의 참혹한 비극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행한다는 일념으로.
킬러리스트
노희준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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