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란도의 여름, 노을이 내리다
벽란도는 섬(島)이 아니고 나루터다. 개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며 대륙과 연결되는 국제 항구다. 중국 산동반도 등주에서 출발한 명나라 화물선이 서해바다 직항로를 건너 예성강 하구에서 거슬러 올라왔다. 돌아갈 때는 고려의 특산물을 싣고 자연도, 마도, 고군산도를 거쳐 명주로 갔다.
중국의 사신이 들어오면 우벽란정에 조서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 사신을 유숙케 했다. 융숭한 대접은 기본이고 객고도 풀었다. 사람과 물산이 빈번히 오고가는 길목이라 상업이 발달하고 유곽이 번창했다. 벽란도는 재화가 유통되는 국제항구이며 고려 왕국의 관문이었다. 이러한 벽란정이 있는 나루터라 하여 벽란도(碧瀾渡)라는 이름을 얻었다.
날아가는 새를 쫓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몸을 다친 이성계는 개경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벽란도에 머물렀다. 말을 타지 못하고 교자(轎子)에 실려 오는 중상이었으므로 몸을 추스르기 위한 요양이었다. 무녀 방올이의 예언이 적중했을까? 전화위복의 산고일까? 운명의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계가 없는 정국은 반전을 노려 급박하게 돌아갔다.
개풍에서 여막살이 하던 방원에게 이제(李濟)가 찾아왔다. 이제는 권신 이인임의 아우 이인립의 아들로 이성계의 셋째 딸과 혼인하여 방원과는 처남매부지간이다. 훗날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정도전과 함께 방석을 옹립하려다 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저들이 정도전과 조준을 죽이려 합니다."
정몽주는 탄핵을 받아 귀양 떠난 정도전과 조준이 있는 귀양처에 김귀련과 이반을 파견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현장에서 왕명으로 국문(鞠問)하여 처형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소식을 정탐한 이제는 부리나케 속촌(粟村)의 여막으로 방원을 찾아온 것이다.
"몽주는 반드시 우리 집에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먼저 제거해야 되겠다."
"예! 예!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제로부터 개경 소식을 전해들은 방원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방원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졌다. 이제 죽고 죽이는 순간이 아니라 먹고 먹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가자,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가자."
두 사람은 말에 올라 말채찍을 꼬나 쥐었다. 채찍에 놀란 말이 질풍처럼 달렸다. 벽란도에 도착한 방원은 황급히 이성계를 찾았다.
"저들이 정도전과 조준을 죽이고 나면 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할 것입니다."
분기탱천한 방원이 목소리를 높이며 위기를 알렸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성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방원의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개경으로 들어가셔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묵묵부답이었다. 방방 뛰는 방원을 지긋이 내려다 볼 뿐이었다. 방원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처남은 뭐하는가? 어서 빨리 아버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세."
아버지의 의지를 꺾는 강제성이 발동되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방원으로서는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최초의 역행이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교자에 강제로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왔다
숭교리에 돌아온 이성계는 사태파악에 나섰다. 위기였다. 정몽주가 대간을 동원하여 조준과 정도전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우선 아들 방과와 동생 이화의 사위 이제 그리고, 황희석과 조규 등을 대전에 보내어 공양왕에게 자신의 진정을 전하도록 했다.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계책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하늘이 두려울 뿐입니다.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태조실록>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조준과 정도전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간을 벌고 대질심문으로 진실을 가려보자는 얘기다. 사태를 풀어나가는 성향이 방원은 불같은 성미에 즉흥적이지만 이성계는 달랐다. 즉각과 즉시를 선호하는 무인이었지만 냉정한 머리와 침착한 행동으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성품이었다.
공양왕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몽주와 함께하는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이성계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준과 정도전의 목숨이 경각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성계가 공양왕을 설득하려는 계획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방원은 조준과 정도전이 희생당하면 그 다음 표적은 자신과 이성계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계의 숭교리 사저에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모두가 이성계와 한 배를 탄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누구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뜰밖에 여치소리가 들린다. 숨 막힐 것 같은 적막감을 깨며 방원이 입을 열었다.
"몽주를 죽여야겠습니다. 몽주는 우리 집에 화근입니다. 몽주를 죽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최선책이 아니느니라."
이성계의 답은 짧았지만 여운은 무거웠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정몽주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가야할 인물이었다. 그것은 함주 막사에서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이래 변함없는 생각이었다. 혁명동지 정도전과 이색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이어서 라기 보다 '새나라'라는 한 배를 타고 가야 할 동량(棟梁之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선비를 좋아했던 장군
이성계는 무인(武人)이면서도 문인(文人)과 학문을 좋아했다. 특히 성리학 하는 선비들을 끔찍이 아꼈다. 그들이 추구하는 덕목인 깔끔하고 깨끗한 도덕성에 매료되었다. 따르는 사람도 조준, 정도전, 남은, 배극렴, 정총 등 중량급 문인들이 목숨 걸고 전장을 누볐던 무인들보다도 더 많았다.
이성계는 전투의 막간을 이용하여 진중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기도 했다. 대학연의는 고려의 제왕들이 탐독했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뛰어넘는 책으로 송나라 시대 진덕수가 대학(大學)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간추려서 편찬한 책으로 성군 세종이 백번도 더 읽었다는 조선최대의 제왕학(帝王學) 교과서다.
자신의 슬하인 방과, 방우, 방원을 비롯한 아들들도 무인의 길을 만류하고 신유학을 공부시켜 조정에 출사시켰다. 무인은 국체(國體)를 보호하고 바람막이 역할을 할 뿐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선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등극한 이성계는 조정의 중요 요직에 무인을 배제하고 문인을 전면 배치한 것으로 그의 생각을 현실에 구현했다. 헌데, 한국 현대사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복 입었던 자들을 그대로 등용하거나 옷을 갈아 입혀 기용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비되는 장면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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