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일 의병장 기록화. 맨상투에 평민복 차림을 한 것이 인상적이다.최장문
김천일 의병장은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 진주를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아군 1만5천여 명은 10만 대군의 일본군과 9일 동안 100여 차례 공방전을 벌이다가 성(城)이 함락되었다. 이에 김천일은 함께 싸우던 큰 아들을 부둥켜안고 촉석루에서 남강에 투신·순절하였다.
진주성 전투의 패배는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성이 함락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천일의 군사 전략적 실패를 패배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천일과 호남의병의 진주성 혈전으로 일본군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어 호남 공략에 대한 공세를 약화시켰다.
국가기념관은 한 명만 키운다?
국가의 위기 때 의병을 조직하여 적군과 싸우다 순국한 지도자는 분명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충절의 행적이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민의 협조와 참여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