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근대 박물관, 영산포

[전남나주 답사 ④] 영산강이 만든 근대의 도시 경관

등록 2007.02.04 16:47수정 2007.02.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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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남 8개 시·군을 관통하며 흐르는 영산강

전남 8개 시·군을 관통하며 흐르는 영산강 ⓒ 전남역사교사모임

호남의 젖줄, 영산강

예로부터 '호남에 가뭄이 들면 전국이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호남의 기름진 곡창지대는 우리나라 전체 식량을 책임지는 곡간 구실을 해온 것이다. 그 기름진 평야에 젖과 같은 물줄기를 공급해 온 강이 바로 영산강이다.


'영산강'이란 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쓰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에 못이긴 흑산도 사람들이 나주지역으로 이주해왔고, 동네이름을 흑산도의 가장 큰 섬인 '영산도'의 이름을 따서 영산마을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강의 이름은 영산강이 되었고, 포구의 이름도 영산포가 되었다.

영산강의 애칭에는 '금호'가 있다. 현재의 금호고속·금호건설 등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영산강이 호남인의 젖줄이자 마음의 고향이란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새로 만들어지는 일본인의 도시, 영산포

@BRI@현재의 영산포 지역은 10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여름철 영산강의 범람 때문이다. 한여름의 폭우와 밀물을 타고 올라온 바닷물이 영산포에서 만나면 그 일대는 일년에도 여러 번씩 물바다가 되었다.

영산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개항(1876)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영산포는 목포와 영산강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주·광주의 내륙 소비시장까지 배로 직접 화물 수송이 가능했고, 나주평야의 쌀을 운반해가기에 편리했다.


일제의 식민지 권력은 영산포 일대에 현대적인 제방공사를 실시하여 강의 범람을 막았다. 이어서 일본인 마을이 들어서고, 관공서 및 금융·행정기관이 들어서 새로 만들어진 도시의 주인이 되어 식민지 나주·영산포의 사람들과 물자를 지배하여 갔다.

a 1910년대에 영산포 선창에 정박 중인 증기선과 돛단배. 영산강 포구에서 목포까지 조선 돛단배는 18시간, 일제의 증기선은 5시간 정도 걸렸다.

1910년대에 영산포 선창에 정박 중인 증기선과 돛단배. 영산강 포구에서 목포까지 조선 돛단배는 18시간, 일제의 증기선은 5시간 정도 걸렸다. ⓒ 전남역사교사모임

a 영산포에 배가 들어오던 시기에 사람들이 들고났던 여객 터미널(0안)의 현재 모습. 예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산포에 배가 들어오던 시기에 사람들이 들고났던 여객 터미널(0안)의 현재 모습. 예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전남역사교사모임

a 1914년에 만들어진 영산포 개폐식 목교. 홍수가 나면 잠수교가 되었으며, 나무로 만든 것이라 1년에 한번씩은 보수를 해야만 했다. 지날 때는 2전씩 통행료가 있었는데 돈이 없으면 선창에서 산 고등어 2마리를 주고 건넜다고도 한다.

1914년에 만들어진 영산포 개폐식 목교. 홍수가 나면 잠수교가 되었으며, 나무로 만든 것이라 1년에 한번씩은 보수를 해야만 했다. 지날 때는 2전씩 통행료가 있었는데 돈이 없으면 선창에서 산 고등어 2마리를 주고 건넜다고도 한다. ⓒ 전남역사교사모임

a 영산포에 인접해 형성되었던 일본인 마을. 왼쪽의 높은 방벽은 1989년 하천 범람이후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뒤쪽으로 일제시대 영산포 개폐식 목교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다리가 놓인 것이 보인다.

영산포에 인접해 형성되었던 일본인 마을. 왼쪽의 높은 방벽은 1989년 하천 범람이후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뒤쪽으로 일제시대 영산포 개폐식 목교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다리가 놓인 것이 보인다. ⓒ 전남역사교사모임

a 동정 거리. 일본인 거리로 나주평야의 쌀을 도정하기 위해 정미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현재도 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곧잘 사용된다. 1990년대 흥행한 ‘장군의 아들’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동정 거리. 일본인 거리로 나주평야의 쌀을 도정하기 위해 정미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현재도 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곧잘 사용된다. 1990년대 흥행한 ‘장군의 아들’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 전남역사교사모임

a 구로스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집. 일제 때 나주에서 제일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대지주의 집. 1935년경 지었는데 당시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큰 규모의 집이었다.

구로스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집. 일제 때 나주에서 제일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대지주의 집. 1935년경 지었는데 당시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큰 규모의 집이었다. ⓒ 최장문

살아있는 근대 박물관, 영산포


그러나 이처럼 번영을 누리던 영산포도 호남선 철도 개통(1914)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현대에 오면서 영산강 물길의 의미는 거의 사라졌다. 영산강 상류에 1970년대 후반부터 농업용수 확보와 홍수조절을 위하여 광주댐·나주댐·장성댐·담양댐이 만들어지고, 강의 하류에는 영산강 하구둑이 만들어졌다.

하천 범람은 없어졌지만 강물의 양이 급속히 줄어들어 수로교통의 역할은 상실되었다. 현재는 당시에 만들어진 건축물과 홍어의 거리만이 과거의 영화를 쓸쓸히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현재 나주시는 영산포 일대의 근대 도시 경관을 두고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한다.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는 일제의 도시경관을 보존하여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것인지, 싹 밀어내고 재개발을 하여 원도심을 활성화 할 것인지?

a 영산포 일대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다는 ‘아망바위’. 보일 듯 말 듯 한 영산포의 근대 도시경관을 보고 있다.

영산포 일대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다는 ‘아망바위’. 보일 듯 말 듯 한 영산포의 근대 도시경관을 보고 있다. ⓒ 최장문

이방인의 소견으론 전자 쪽이었으면 좋겠다.

호남의 젖줄 영산강 포구에 만들어진 일제의 근대 도시 경관! 그리고 그 속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살다간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꿈꾸며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갔을까?

공간(세트장)은 이미 만들어져 있으니, 살다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닮는 매체(영화, 소설, 교육·관광 장소 등)만 있다면 '천년 고도 목사골 나주'와 연계하여 전국에서 찾는 브랜드 전통도시로 성장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속삭여 본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사람을 닮은 석장승'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에는 '사람을 닮은 석장승'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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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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