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개정, 정상적 나라 만들기 운동"

[주장] 파란과 졸속으로 점철된 우리 헌정사를 망각하지 말자

등록 2007.02.03 14:45수정 2007.02.0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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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1월31일 열린 '좋은 헌법 개정 논의를 촉구하는 시민사회 174인 선언'

지난 1월31일 열린 '좋은 헌법 개정 논의를 촉구하는 시민사회 174인 선언' ⓒ 주영남

개헌 논의 촉구 174인 선언 참여를 종용하기 위해 적지 않은 지인들과 전화 통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엄청난 가치 전도 현상을 발견했다. 자신과 국민의 이익이라는 가치 기준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나라당 주요 대선 주자의 이익이나 대통령의 이익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노대통령의 제안을 받겠냐? 박근혜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받겠냐?' 맞는 얘기다. 이번 대선에서 대권을 쥐지 못하더라도 5년만 기다리면 기회가 올텐데 자칫 8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4년 연임제 개헌안을 왜 받겠는가?

신기한 것은 한나라당과 박근혜의 입장은 이렇게 잘 감안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후세와 국민의 이익과 구조화된 무능·무책임 정치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경제민생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출직의 공무원의 권능·임기·선거방식 등을 변경하는 개헌은 누가 하든, 언제 하든, 어떤 내용으로 하든 정치세력들의 이해득실이 첨예하게 엇갈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한나라당과 박근혜 입장에서 개헌 논의가 불리하니 동의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다음 정권에서도 불리한 어떤 정치 세력이 결사 반대 할 수밖에 없다.

@BRI@사실 현행 헌법의 개정이 국회 재적 2/3 이상의 동의를 거쳐 국민투표에 부치도록 되어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주요 정치세력들의 합의 없이는 개헌을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다음 정권에서는 2/3 이상의 합의가 가능할까? 도대체 지금과 무엇이 달라지기에 2/3 이상이 가능할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서로 존중하고 상생하는 문화가 갑자기 형성되어서? 결코 아닐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곧이어 총선에서 2006년 지방선거 같은 압승을 거둬서 한나라당 홀로 2/3를 넘겨버리는 것이다. 이는 일방 개헌을 의미한다. 부자 몸조심 하느라 얼마 전까지 공언했던 말을 뒤집어 엎고, 경제·민생과 정치·헌법을 분리시키는 우민화 정책을 쓰고, 친미반북우파조차 반미친북좌파라고 몰아부치는 정당과 언론이 2/3 이상의 압승을 거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파란의 헌정사를 보면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한나라당이 지방 선거 같은 압승을 거둘 가능성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다. 한나라당이 2/3를 넘기지 못하면 개헌은 쉽지 않다. 개헌이 안되면 무능·무책임 정치가 지속될 것이고 다음 대통령과 여당은 노태우부터 노무현까지 4명의 대통령과 7개인지 8개인지 모를 여당 짝이 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이를 노리고 '이대로'를 외치는 속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준엄한 국제 경쟁 환경에서 나라와 정치가 망가지는 것은 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략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현명한(?)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창조하거나 방조할 미래는 압승한 한나라당의 일방 개헌이거나 현행 헌법 유지일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문이다.

또 하나 스스로 꽤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한 부류는 대통령의 문제 제기 방식이나 리더십에 대해 온갖 비판을 늘어놓았다. '앨빈토플러 대통령'이라는 비판도 그 중에 하나이다. 노대통령은 실행 가능한 당면 핵심 현안보다는 비전2030, 대연정, 개헌론 같은 중장기 전략 과제나 방향을 설파하고 환기하는데 너무 많은 정치적 자원을 쓴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는 비판이다. 그 외에도 여기에 쓰기가 민망한 비판도 있다. 한마디로 충분한 사전 정지·교감 작업 없이 불쑥 내지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만하면 로맨스로 될 사건들이 강간 사건이나 폭력사건처럼 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도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임기가 1년 정도 밖에 남지 않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런 비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이미 현실적 영향력에서 대통령을 못지않고 향후 한국의 최고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의 지극히 후진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빨리 망각한 역사

나는 노대통령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매우 피상적이라고 생각 하지만 결코 과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더 날카롭고 더 아프게 노대통령을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록 거친 것이 분명하고 사전 준비가 충분하지는 않은 것도 분명하지만 어쨌든 대의를 강조하고 미래를 강조하는 대통령의 제안을, 못배우고 몰상식한 아줌마나 아저씨처럼 받아들이는 미래 최고권력자들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더 신기한 것은 노대통령의 문제 제기 방식이 거칠다고 해서 그의 제안의 요지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는 것이다. 또 무시하는 야당의 태도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야 말로 손톱에 묻은 때를 빌미로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않거나 잘못됐다고 하는 가치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 대통령에게 최고수준의 지혜와 도덕을 요구하고(그것을 근거로 비판하고) 미래의 대통령들에게는 보통 사람 수준의 지혜와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가치 전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개헌 관련된 일을 하면서 내 지인들이나 언론이나 시민사회가 역사를 너무 빨리 망각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파란과 졸속으로 점철된 우리의 헌정사를 너무 빨리 망각해 버린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헌정사는 압도적 힘의 우위에 있는 집권세력의 치졸한 권력 독점·연장 기도 이었거나, 5.16, 5.17 쿠데타의 산물 이었거나, 4.19와 6월 항쟁이라는 유혈 사태를 동반한 국민적 압력의 산물이었다. 당연히 제헌과 개헌 과정에서 국민적 여망과 최고 수준의 지혜가 심도 깊은 숙의와 질서있는 참여를 거쳐 헌법에 반영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단지 권력 독점·연장이나 권력 분산·견제를 둘러싼 저차원적인 정치 투쟁만 있었을 뿐이다. 권력을 잡은 측이 내적 필요성(권력독점, 집권연장등)에 따라 주도적으로 행한 개헌은 1952년 발췌개헌(1차), 1954년 사사오입개헌(2차), 1961년 12월의 3공화국헌법(5차), 1968년 3선개헌(6차), 1972년 유신헌법(7차), 1980년 5공화국 헌법(8차)이다.

이들 헌법 개정을 주도한 세력치고 국리민복이나 안보를 들먹이지 않은 세력이 없었지만, 이들이 헌법개정을 통해서 노리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부끄러운 역사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일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현실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음 정권에서 개헌을 하도록 노무현 정권하에서는 논의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너무 무책임하고 안이한 6월 항쟁 주도세력

6월 항쟁의 헌법적 성과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 뿐이다. 6월 항쟁을 주도했던 재야민주세력과 야당은 독재 방지에 치중하면서 정치의 능력과 책임 문제등을 깊이 고려하지 못하였다. 아니 헌법 전반에 대해서 이해와 관심이 너무 낮았다. 예컨대 한국 정치의 무능과 무책임성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5년 단임 대통령제는 항쟁 주도세력이 그 의미와 후과를 깊이 검토하지 않은 가운데 여야 밀실협상에 의해 대통령 간선제를 핵심으로 한 5공 헌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넣은, 7년 단임대통령제를 임기만 약간 줄이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탄생하였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례없이 상세하게 명시된 헌법상 기본권 관련 조항도(이를 이유로 매우 진보적인 헌법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기본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이상과 합의(계약)의 표현이 아니라, 체육관 선거에 대한 비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겉치레 장식품에 불과하였다. 그러다보니 기본권을 옹호하는 측이나 억압하는 측이나 헌법을 진지하게 참고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선진국과 달리,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갈등의 현장에서 최상위 사회 계약서인 헌법 정신이나 헌법 조문은 참고되거나 존중되지 않는다.

어쨌든 87년 헌법이 권력구조 측면에서 모순이 심각하다보니 20년 동안 계속 권력구조 관련된 헌법적 이슈가 반복 등장했다. 중간평가 공약, 3당 합당과 내각제 개헌 합의,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 재신임 추진, 개헌 공약, 탄핵 파동, 국무위원 임명시 대통령의 관행적 헌법 위반 등이 그것이다.

정말 현행 헌법은 탄생 과정으로 보나, 흐르는 정신으로 보나, 갈등의 현장에서 겉도는 모양새로 보나, 시대 현실과의 심각한 부조화로 보나 결함이 매우 많은 헌법임에도 불구하고 독재 방지 효과로 인해 그 개정의 공론화가 너무 늦었다.

국가의 수많은 최고질서가 정말로 우습게, 졸속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을 너무나 의연하게(?) 지켜보았다. 어쩌면 6월 항쟁 주도세력과 국민들은 오로지 권력구조만 지켜보는 가운데, 노태우,김영삼 정권의 레임덕 현상과 당시 여당 유력 주자의 대통령과의 차별화 혹은 대통령 무력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대통령과 더불어 정치의 핵심 축인 국회의원의 정치적 무능의 문제도 다음 선거에서 사람을 잘 뽑으면 해결되는 리더십의 문제로 바라 보았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헌법에 대한 국민적 무관심과 이해부족은 6월 항쟁 주도세력과 지식사회의 저열한 지적 능력의 발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경제·민생과 정치·헌법의 분리

대중적 개헌 논의를 가로막는 논리적 장벽은 3가지였다. 하나는 정치가 유능하든 무능하든 세계화, 지식정보화, 민주화, 고령화 등의 제약으로 인해 경제민생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다는 정치 무용론적 인식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주요 언론이 퍼뜨린 악성 바이러스인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속깊은 판단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인식은 정치와 헌법개정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낭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반대의 편향은 최장집 선생이나 민주노동당처럼 정치리더십이 신자유주의를 일방적으로 추종해서 경제민생의 어려움이 생겨났다는 인식이다. 물론 주요 언론과 한나라당은 정치리더십이 무능하고 반미친북좌파적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런 인식은 결국 정권을 자기들에게 넘기면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정치 선전으로 비화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인식들은 공히 경제민생 현안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세번째 논리적 장벽은 정치적 무능과 정치리더십및 법·제도의 상관 관계였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지인들은 헌법·선거법만 바꾸면 정치적 무능이 해결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일리가 있는 얘기다. 그런데 헌법·선거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통한 정치리더십의 교체만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자문은 하지 않았다.

하여간 현재의 경제민생 현안이 '혁신 관료'의 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유능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손에서 해결될 문제이고, 이는 헌법과 선거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해결이 난망하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정말로 어려웠다.

결국은 자기 논리 부재

과거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비난받고 탄압을 받을 때 그 기준은 북한에 이롭냐 아니냐였다. 그런데 이런 독재정권의 이런 논법에 많이 시달렸던 친구들이 희안하게도 개헌 논의 촉구 운동을 바라볼때는 노대통령에게 이롭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노대통령을 이롭게 하면 노빠로 찍힐 것이니까 행동을 자제한다는 논법이었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메지 않는다'는 선비의 도덕을 점잖게 들먹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행위로 인해 도적의 노략질을 방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고와 행동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과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현재 개헌 논의 촉구 운동은 본질적으로 '호헌철폐' 투쟁에 다름아니다. 민노당 진영이 호언 진영으로 가서 붙었을 뿐 그 진영 구도도 비슷하다. 그런데 1987년에 비해서는 그 내적 동력도 여건도 너무나 열악하다. 유일하게 기대를 걸어볼 만한 것은 올해가 대선과 총선에 인접한 시기라는 것 뿐이다.

슬픈 일이지만 이때 비로소 국민이 주권자 행세를 조금은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 운동은 단지 0.5포인트(4년 연임제 개헌안)나 원포인트(노대통령의 개헌안)에 대한 찬반 운동이 아니라 사실상 너무나 비정상적인 나라를 정상적으로 바꾸는 나라 만들기 운동이다. 그렇기에 10년을 할 국민운동이 아닌가 생각된다.

덧붙이는 글 | 김대호 기자는 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김대호 기자는 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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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전 김대호산업경영연구소 소장(2005) 전 대우자동차기술연구소 차장(2003) '노무현 이후-새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2009) '희망한국프로젝트'(공저)(백산서당, 2007) '진보와 보수를 넘어'(백산서당, 2007) '한386의 사상혁명'(시대정신, 2004)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사회평론,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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