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28회

등록 2007.02.05 08:10수정 2007.02.0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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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도…."

마른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고윤의 말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뱉은 말은 아마 빨리 도망가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허나 설중행은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제는 쇠사슬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고윤의 한쪽 팔을 매달고 있는 쇠사슬을 끌러냈다.


'어차피 각오하고 있었던 일!'

@BRI@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순조롭게 동료를 구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아무 탈없이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을 무사히 구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하고 어쩌면 이곳에서 죽어도 할 수 없다는 각오도 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동료를 구해야 하느냐고 누군가 설중행에게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다. 능효봉의 지적에 대답은 했지만 구한 후에 어떻게 그들을 어떻게 무사히 운중보 밖으로 나가게 하느냐는 것도 사실 뚜렷한 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이란 때로 남들에게는 무모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설중행은 이 일이 그런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타다타닥-----!


갑자기 사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열려져 있던 문과 창문의 안쪽 덧문들이 닫히고 있는 소리였다. 흐린 밤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안력을 돋구어보면 윤곽이라도 알 수 있었던 모든 시야가 암흑 속에 빠져버렸다.

사실 창문의 안쪽 덧문이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웬만한 장정이 주먹으로 치면 부수어질 정도였지만 덧문이 닫히는 순간 느껴지는 답답함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마치 감옥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개(開)…!"

요란한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옥청량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열라는 말일까?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불이 밝혀졌다. 아니 불이 밝혀진 것이 아니라 불빛이 어둠을 뚫고 쏘아졌는데 네 줄기의 강렬한 불빛은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고윤의 쇠사슬을 풀고 있는 설중행을 향해 요상하게도 일직선으로 쏘아갔던 것이다.

약간 붉은 빛이 섞인 네 줄기의 불빛이 일제히 설중행에게 쏘아지자 어둠에 익숙해졌던 그의 눈은 갑자기 제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갑작스런 강렬한 빛줄기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검은 두건으로 그가 머리와 코 아래를 묶었기 때문에 눈 주위만 보일 뿐 그의 얼굴모습을 확연히 알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염화호목(炎火虎目)이라고 불리는 철기문의 백철등(白鐵燈)이 바로 저것이었군.'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을 멀게 한 네 줄기의 빛을 보며 생각해 낸 것이었다. 철기문의 기병(奇兵)이라고 알려진 저것은 매우 강렬한 빛줄기를 쏘아내는데, 특이한 장치로 인해 빛줄기가 퍼져 나가지 않고 직선으로 쏘아나가는데 그 특징이 있었다. 특히 저것은 어둠 속에서 매우 효과적일 뿐 아니라 처음 접하는 사람을 매우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백철등에는 또 다른 묘용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고, 무섭다는 점만큼은 삼십 년 동안 철기문에 스며들어가고자 했던 그 어떠한 자들도 저것으로 인하여 모두 희생되었다는 데에서 입증되고 있었다.

백철등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철저한 준비를 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설중행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쇠사슬의 매듭은 풀기 어려웠다. 그 순간 무언가 자신의 좌우에서 쏘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스으으으-----

마치 뱀처럼 기척 없이 양 어깨를 노리고 날아드는 느낌에 그는 풀려다 만 쇠사슬을 잡고 몸을 허공에 솟구쳐 올렸다. 이미 오감(五感)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시력(視力)은 마비된 상태인지라 청각에 의지해야 했지만 청각 역시 소리를 내지 않는 공격에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미세한 공기 흐름에 반응하는 감각뿐이었다.

파팍----!

날아 든 것은 가는 은사를 꼬아 만든 일종의 채찍과도 같은 것인데 그 끝에는 정교하게 원추(圓錐) 모양의 철심이 달려있어 사람의 몸 정도는 그대로 관통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철기문에서 개발해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은사절편(銀絲節鞭)이었다.

은사연편(銀絲軟鞭)과 구절편(九節鞭)의 장점만을 살려 가는 철심에 은사를 감아 만든 이것은 치명적인 살상무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때에 따라 편두(鞭頭)에 달려있는 원추의 철심으로 상대의 몸을 관통해 꿰어둠으로서 상대를 생포하는데 유용한 무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치명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상대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은사절편은 설중행의 신형이 허공에 떠오르자 목표를 잃고는 아직 매달려 있는 고윤의 어깨와 목을 파고들었다.

"허억!"

비명은 크지 않았다. 고윤에게는 비명을 지를만한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목을 관통한 뒤 파고 들어온 구명으로 다시 빠져 나오자 살점이 묻어 나옴과 동시에 피가 한순간 뿜어졌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어차피 그냥 놔두어도 하루 이상을 더 지탱할 수 없었던 고윤의 생명은 그 순간 꺼져버렸다. 철심 두 개가 그의 몸을 파고들고 빠져나가는 짧은 순간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던 것이 그가 보였던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빌어먹을!'

생각을 못했다. 시력이 상실되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없이 자신의 몸을 피하는데 급급한 그로서는 고윤이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불현듯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고윤을 구해내지 못해서가 아니었고, 고윤을 죽게 만든 실수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동료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이런 현실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 정확할 터였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능함에 대한 발악과도 같은 분노일 터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의 분노를 표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일시적으로 잃어버린 시각의 답답함이 그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지만 그는 허공에서 유연하게 몸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섰다. 이미 고윤이 죽은 이상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한 가지였다. 이제 이곳을 어떻게 무사히 벗어나느냐는 것.

유연하게 몸을 내려설 때는 이미 자신을 노리고 있는 자들과 싸우기 위한 모습으로 보였지만 그의 계산을 달랐다. 설중행은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옆으로 미끄러지며 날아가 혈간의 시신이 안치된 관 위로 올라섰다. 그것은 자신의 앞에서 죽어간 동료를 죽인 것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종의 보복이었고, 또한 혈간의 관 위에 있음으로서 상대의 공격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더구나 낮에 와서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고자 작정했던 탈출로이기도 했다. 관을 밟고 상대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몸을 돌려 뒤쪽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창문을 뚫고 나가면 생사림 쪽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일 놈!"

백철등이 그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가 관 위에 올라서자 분노에 찬 옥기룡의 목소리가 들리며 주위에서 강렬한 살기가 쏘아 나왔다.

츠으으-- 츠--팟---!

이미 저들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관 뒤쪽 아래에서 두 줄기 섬광과 함께 설중행의 하체를 노리고 검날이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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