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를 대신해 변강쇠를 응징한 '장승'

[전남나주 답사 ⑤] 장승은 민초의 자화상

등록 2007.02.06 08:51수정 2007.02.0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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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석장승 답사 안내를 해주신 정선생님. 장승과 꼭 닮았다. 그 마음 까지도...

석장승 답사 안내를 해주신 정선생님. 장승과 꼭 닮았다. 그 마음 까지도... ⓒ 여혜경


@BRI@"전라도 말에 '이 벅수 같은 놈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승 같이 멍청히 서 있는 놈'이라는 욕이죠. 답사 안내를 하면서 선생님들이 나보고 장승 닮았다고 하데요. 근데 그 말이 듣기 좋았습니다. 저도 장승처럼 늙어가고 싶어요."

답사 마지막 날 운흥사 터와 불회사의 석장승을 안내한 정경호 교사의 말이다. 그의 장승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승의 기원은 솟대·선돌·신목 등과 함께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원시 신앙물로서 부족민의 공통적 염원을 닮고 있다. 장승은 마을신 가운데 산신·서낭신·용왕신에 비하여 하위 신으로서 솟대·돌무더기 등과 같이 민초의 삶 속에 밀착되어 있었다.

삼국시대 들어 불교에 흡수되어 전승되었으나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르는 동안 민간신앙의 저변으로 흘러들었을 뿐 불교라는 제도권에 안착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자 지배층 문화에서 소외된 불교·도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신석기 이래의 민속적 장승 신앙이 부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새로운 장승문화에서 그 이름이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 (地下女將軍) 등으로 붙여졌다. 16∼17세기 임진·병자 양 난을 거치면서 공동체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장승은 크게 마을 장승과 사찰 장승으로 구분되어,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거쳐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장승 설화를 보면 권선징악의 내용이 많다. 변강쇠전도 여기에 해당한다. 변강쇠가 어릴 때 나무를 하기가 싫어서 장승을 뽑아다 불을 땐다. 어른으로 성장하며 조선 최고의 정력가가 되어 팔도를 누비지만 결국은 온갖 잡병에 걸려 죽게 된다.

변강쇠는 결과적으로 가족 파괴범이며 마을 공동체를 해치는 사람이었다. 민초들은 장승을 통해 악을 응징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승은 민초들의 고민을 말없이 들어주고 속상함을 어루만져주는 참다운 벗이자, 자화상이었다.


이렇게 예쁘고 친근한 장승 봤어요?

a 운흥사터 하원 당장군(여)

운흥사터 하원 당장군(여) ⓒ 최장문


운흥사터 입구에 도착하니 석장승 두개가 서 있다. 쌍꺼풀이 진 눈에 눈동자는 크고 동그랗다. 코는 두드러지게 크며 콧등에는 한 개의 주름살이 그어져 있다. 정 선생님은 보면 볼수록 정감이 생겨 보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할머니 장승을 안고 보듬어 본다. 중학교 때 돌아가신 할머니 같다. "얘야 욕심 내지 말고 그냥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듯 하다. 순간 내가 삶에 너무 집착하여 바쁘게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석장승 이마에 새겨진 ‘X’

석장승 이마에 새겨진 ‘X’ ⓒ 최장문


엄마를 따라온 꼬마가 정 선생님께 질문을 한다.
"장승 이마에 새겨진 'X'는 뭐예요?" 듣고 보니 나도 궁금하다. "부처의 백호"라고 한다. 민속신앙이었던 장승이 사찰에 들어오면서 이마에 부처님의 백호가 'X'자로 표시된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왜 X일까? 불교가 석공의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피곤에 지쳐 빨리 일을 끝내려고 간단히 표시한 것일까? 석장승이 만들어진 이후에 사찰에서 빠진 백호를 새겨 넣은 것일까?' 석공만이 알 일이다.

버스에 올라 10분이 채 안되어 불회사 입구의 석장승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전문가들에게 최고의 석장승이란 평을 받고 있는 걸작이다.

a 불회사 석장승. 최고의 걸작답게 무인경비시스템인 세이콤이 설치되어 있다.

불회사 석장승. 최고의 걸작답게 무인경비시스템인 세이콤이 설치되어 있다. ⓒ 최장문


a 선생님들은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운흥사터 석장승이 더 다정다감하고 예쁘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운흥사터 석장승이 더 다정다감하고 예쁘다고 한다. ⓒ 최장문


이들 장승은 사찰 안의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고자 세워졌겠지만 인상은 한평생 자기 삶을 열심히 사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 같다.

할머니 격인 주장군은 얼굴이 온화하여 웃는 인상이 부드럽다. 눈을 부릅뜨고 콧등을 찡그렸어도 무서운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할아버지 격인 하원 당장군은 고집이 세 보이면서도 아주 해학적인 멋을 풍기고 있다. 왕방울 같은 눈은 양옆 관자놀이까지 치켜져 올랐으며 '一'자로 꽉 다문 입 언저리 양쪽에는 덧니가 아래로 뾰족하게 돌출 되었다.

a 하원 당장군의 ‘下’자가 ‘王’자로 되어있다. 그런데 글자가 좀 엉성하다. 후세 남자들이 下에 획을 추가하여 王자로 만든 듯 하다.

하원 당장군의 ‘下’자가 ‘王’자로 되어있다. 그런데 글자가 좀 엉성하다. 후세 남자들이 下에 획을 추가하여 王자로 만든 듯 하다. ⓒ 최장문


마을 입구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고 무언의 말을 건네주는 그런 장승이 지금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차로 "쌔∼앵" 지나가면 장승과 그런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지 않는가? 갑자기 막막해진다.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준 만큼이나, 인간에게 외로움도 준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마지막 기사인 '전남 나주 답사의 3박자'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에는 마지막 기사인 '전남 나주 답사의 3박자'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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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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