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부르는 노래

제 시집이 나왔습니다

등록 2007.02.10 11:51수정 2007.02.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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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임숙

이름 있는 곳으로 등단을 하고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더라면 벌써 신문 한쪽에 신간 안내라도 실렸겠지만 저는 이름 없는 문예지로 등단했고 또한 이름 없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한 권 냈습니다. 시집이 나온 지는 이제 3~4일 되었습니다.


시집 제목은 <를 발음하기>입니다. 몇몇 아는 분들에게 책을 건넸더니 왜 시집 제목이 이러냐고 묻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 보인다나요? 시집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저의 형편을 조금 더 잘 알아야 되겠기에 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번에 중학교에 입학하는 우리 딸은 청각장애아입니다.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받았지만 기계로 듣는 소리여서, 그것도 한쪽 귀로만 듣는 소리여서 사람들의 말을 그렇게 잘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보청기보다는 소리를 조금 더 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를' 발음과 '을' 발음이 잘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그 발음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가르쳐 줘도 안 되기에 마음이 많이 안타까웠지요. 그래서 시를 썼습니다. 그때 쓴 시가 바로 "를 발음하기"입니다.

'를'은 '을'과 자매지간이지만 입천장을 떨게 한단다
그렇지만 조바심이 일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야
그는 받침 없는 곳에서 바닥에 닿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거지

'을'이 받침 있는 섬돌을 믿고 방자하게 입을 떼다가
황급히 혀를 말아 쥐고 입 천장을 짚지 않았다면
아무도 누구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었을 텐데
밑받침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차이가 나지


가슴 울리는 떨림이 있었는가
처음부터 그 떨림 다 보고 있었는가
귀가 멍멍해지도록 아득한 그 소리 듣고 있었는가

영원을 믿고 믿지 않고의 차이는
'을'과 '를'의 발음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데서 시작된 것이겠지


홀로 된 네 소리를 듣고 있으려면 나는 벌써부터
가늘게 가늘게 버들피리 불던 그날 그 소리가
무엇을 어떻게 떨치고 나온 소리였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거야

떨림이 없다면 아무도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작이 끝이 아니라면, 가슴이 없었다면

ㅡ 졸시 "'를' 발음하기" 전문


@BRI@이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딸은 자신이 발음하는 소리를 자꾸 생각해 보는 눈치였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경계가 불분명하던 '를' 발음과 '을' 발음에 경계가 생기고 발음이 바로잡히는 것 같았습니다.

자비출판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이라지만 제가 시집을 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시집을 낸 출판사 사장님이 그냥 시집을 내줄 테니까 원고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은 서점에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렇게 시집을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모처럼의 그 호의를 물리치기도 뭣했습니다.

'그래, 시집 한 권 묶는 것으로 일단 매듭을 짓고 더 좋은 시를 써 보는 거야. 내 시에 한 번 날개를 달아줘 보는 거야.'

이런 마음으로 시집을 엮었습니다. 물론 제 시집은 기성시인의 시 같은 매끄러움과 숙달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뭉게구름 울타리에 갇힌 양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은 온전히 타원형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었어요
꽁지 빠진 슬그머니가
자기도 모르게 태양 빗장을 열어제꼈죠
흑암이 깜짝 놀라 매에 우니까 깃털이 파닥파닥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심장을
심연이라는 골짜기로 날려 버렸죠
궁창이 기가 막혀 파르스름 눈을 떴어요
저를 어째, 하나님 아직 기침하시기 전이었는데요
말씀이 찬란하여 버릴 것 하나 없이 다듬어 놓은 길로
양 떼가 하얗게 달려갔어요
흑암이 메에, 울음을 뚝 떼어서
양 떼 목에 걸어 주었죠
메아리가 하늘 보좌를 울렸답니다
나팔 소리 천지를 울렸답니다
양털이 왜 곱슬곱슬해졌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제 좀 고분고분해지라고
하나님께서 두루 펼쳐든 말씀은
성경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믿기지 않는다면 그만이구요
깃털은 심장이 없어서 새의 날개 아래 깃들였답니다
슬그머니처럼 자기도 모르게
태양 빗장을 열어제끼지 않도록
마음 단속 잘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일 한 가지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이
오늘도 환하게 밝았습니다

ㅡ 졸시 "양털, 깃털, 슬그머니" 전문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오늘도 환하게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집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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