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이제 너를 떠나보낸다

<시 한 편 추억 한 토막> 꿈에 신발을 잃어버리다

등록 2007.02.10 15:50수정 2007.02.1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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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들어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꿉니다 ⓒ 이종찬

@BRI@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마경덕, '신발론'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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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리가 차이는 신작로를 맨발로 걷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 이종찬

해가 바뀌고, 또다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이 고된 세상살이는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도 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듯합니다. 날마다 행여나 오늘은, 행여나 내일은, 하고 봄볕처럼 포근한 희망을 꿈꾸어 보지만 날이 갈수록 양극화로 치닫는 우리의 현실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어젯밤에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살이가 하도 고달프고 서러워서 제법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간밤에는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여기저기 애타게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습니다. 돌부리가 차이는 신작로를 맨발로 걷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발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요즈음 들어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꿉니다. 꿈속에서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마구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신고 다니던 신발이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신발이 낡아 뒤꿈치가 떨어져 너덜거리다가 절로 벗겨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낡은 신발을 버리고 새 신발을 사서 기분 좋게 신고 다니는 꿈을 꾸다가 잔칫집에 가서 즐겁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면 새 신발이 없어 남의 낡은 신발을 신고 찜찜한 기분으로 털레털레 걷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마치 지금껏 제 삶을 살지 못하고 늘 남의 삶을 대신 살아온 나의 자화상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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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나 오늘은, 행여나 내일은, 하고 봄볕처럼 포근한 희망을 꿈꾸어 보지만 날이 갈수록 양극화로 치닫는 우리의 현실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 이종찬

지천명의 나이가 다가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참 자주 꾸었습니다. 특히 마음이 괴로워 술을 많이 마시고 잔 날 밤이나,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미루고 있을 때,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졌을 때, 빚에 시달릴 때에 그런 꿈을 자주 꾸곤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찮게 소꿉친구를 만나 어릴 때 추억을 이야기하며 술을 마신 날 밤에는 신기하게도 낡아 터덜거리는 신발을 잃어버리고 새 신발을 사서 신는 꿈을 꾸었습니다. 게다가 새 신발을 사서 기분 좋게 신고 다니다 잃어버린 뒤 남의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 그 다음 날에는 희한하게도 부음을 듣곤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평소 내가 아끼는 신발을 잃어버린 뒤 그 신발을 찾아 헤매다가 끝내 신발을 찾지 못한 채 꿈에서 잠시 깨기도 했습니다. 그런 때에는 나도 모르게 발바닥을 은근슬쩍 만져봅니다. 근데, 한 가지 희한한 것은 잃어버린 신발을 찾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나는 그날은 반드시 내 두 발이 이불 밖에 나와 있었습니다.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은 곧 죽음이 다가오는 상징이라 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집 밖에 나가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려면 반드시 신발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신발을 잃어버리고 찾지 못하는 꿈을 수없이 꾸었지만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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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발을 찾아 헤매다가 끝내 신발을 찾지 못한 채 꿈에서 잠시 깨기도 했습니다 ⓒ 이종찬

간밤, 신발을 잃어버리는 어지러운 꿈을 꾸고 나자 문득 마경덕 시인의 '신발론'이라는 시가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마경덕 시인의 '신발론'이라는 시는 지난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뛰어난 시입니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라는 그 시구가 가슴을 툭 쳤습니다.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라는 시구가 꿈속에서 잃어버린 내 신발이 전해주는 귓속말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날 아침 나는 신발을 잃어버린 나의 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꿈에 신발이 내 곁을 떠난 것은 내 앞에 놓인 이 세상살이를 결코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뜻이라고. 그 꿈은 내게 주어진 이 고된 세상살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맨발로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긴, 그동안 모은 낡은 것을 내버리지 않고 어찌 새로운 것을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2007년, 정해년의 새로운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다가오도록 내 몸과 마음에 내가 원해서 쌓았든, 내가 원치 않아서 쌓았든 간에 그동안 나에게 쌓인 삶의 무거운 짐을 부려 놓을 때라고 여겨집니다. 그 "짐을 부려놓아"야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새로운 신발을 찾아 신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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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모은 낡은 것을 내버리지 않고 어찌 새로운 것을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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