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태어난 계집애는 팔자가 세다고?

팔자가 세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모순

등록 2007.02.12 09:52수정 2007.02.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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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일은 음력 1월1일 설날이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설날을 하루 앞둔 까치들의 설날에 엄마는 만삭의 몸으로 한 마을에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댁에서 설 음식을 장만하고 계셨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엌 살창을 넘나드는데 부뚜막에 걸터앉아 엎어 놓은 무쇠 솥뚜껑에 전을 부치던 엄마는 아랫배로 전해오는 통증을 느껴 급히 집으로 돌아왔고 천장이 노랗게 변해가는 고통 속에서 나를 낳으셨다.

시계가 흔치 않았던 당시에는 주로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새 날로 계산을 했다는데 우리집에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벽시계가 있었단다. 엄마가 나를 낳고 시계를 바라보니 12시 30분. 하여 나의 출생은 1962년 음력 1월1일 새벽 0시30분이다.

호랑이가 한참 활동을 하는 시간이라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인물이 될 기가 막힌 사주인데 여자로 태어나서 팔자가 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백일을 지나면서 앓은 소아마비로 전신마비가 왔다. 1여 년 동안 좋다는 병원으로, 한의원으로 업고 다니며 치료를 해주신 엄마의 정성 덕분에 다른 신체는 제 기능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한 쪽 다리는 제 기능을 찾지 못해 3급 장애인이 되었다.

"쟈가 말이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인물이 됐을낀데, 기집아로 태어나 액땜 하니라고 다리가 저리 된기라."

절뚝거리는 저를 보곤 툭하면 내뱉은 동네 어르신들의 말이었다. 엄마 또한 이름이라도 남자이름으로 지어 액땜을 해야 했는데 이름조차도 너무 여자다운 이름으로 지어 액을 막지 못했다며 후회를 하시곤 했다.


덕분에 나는 생일상도 따로 받아 본 적이 없다. 설날이기 때문에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서 엄마는 "오늘은 미애 니 생일이네? 니는 먹을 복이 많아 생일상을 항상 푸짐하게 받는기라 마이 묵어라" 하셨다. 그러면 나는 "이기 내 생일상이가? 설날이라서 차린 거제?"라며 투덜대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쑥떡도 있고 감주도 있고 달착지끈한 쌀강정에 갖가지 맛있는 전들이 수두룩했지만, 왠지 언니와 남동생의 생일날처럼 나만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런 세월이 잘도 흘러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친구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생일을 물었다. 무심코 2월5일이라고 했다. 2월5일은 양력으로 태어난 날이다. 남편은 그 생일이 당연히 음력인 줄 알고 시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다. 시어머님이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궁합을 보았는데 찰떡궁합이라고 했단다.

속으로 웃었다. 그러니 엉터리 궁합이 맞을 리가 있나? 성격도, 생각도, 음식도, 취미도 안 맞는 것 투성이다. 비록 궁합이 아니더라도 남남끼리 만나 척척 맞는 부부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참고 극복하며 잘 살고 있는데 생일이 양력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형님이 음력은 며칠이냐고 물었다. 일부러 속이려 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팔자가 세다고 하는 설날 생일을 제삿날 시댁식구가 다 모인 그 자리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잘 모른다고 했다. 그저 엄마가 양력으로만 이야기해줘서 그렇게만 알고 있다고….

나는 미신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많이 들어온 이야기라 '내가 정말 설날에 태어나 팔자가 사나워서 장애인이 되었을까?'하는 의구심이 가끔씩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팔자든 운명이든 어차피 내가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에 지금의 나는 억지로라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늘 부족한 살림에 동동거리며 살고 있지만 애초에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기에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한다.

바람이 '쌩쌩' 부는 날, 밖에 나갔던 아이들이 "아이 추워"하며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작다고 투덜대던 17평짜리 이 집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공간인지, 달랑 김치찌개 하나를 가운데 놓고도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후후 불며 먹고 있는 모습은 마치 행운의 네잎클로버 같아 행복하다.

술 취한 남편이 뒷주머니에 감추어온 과자를 '짠~'하고 내놓을 때, 중·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우~와"하며 함박꽃같은 웃음으로 아빠를 맞이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또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지….

계집애가 설날에 태어나 팔자가 세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모순이다. 어쩌면 내 장애에 대해 미안해 하는 엄마의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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