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대선정국이 시작되면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이 대목을 맞았다.
한나라당 대선예비후보들의 난타전부터 정계개편을 둘러싼 여권 내부의 파열음, 탈당행렬까지. 특히 정치권이 연일 쏟아내는 새로운 소식들은 매일 매일 뭔가 특별하고 새로운 것으로 방송을 채워내야만 하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아이템 기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언론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아진(?) 탓일까. 국민의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오면서 시사 전문채널도 생겼고,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굵직한 시사프로그램만도 10개가 넘게 각자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그래서 청취자들이 이런 환경을 반가워하고 있는지, 다양한 현안과 정보를 제공해줘서 청취자들의 각종 정치적 판단, 혹은 먹고 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나로선 회의적이다. 택시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하다보면 왜 이렇게 하루 종일 골치 아픈 얘기만 해대냐고 불평 하는 분들을 접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역전된 방송과 신문의 헤게모니
아무튼 분명한 건 시사프로그램들이 많아지면서 제작하는 사람들의 여건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노동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질적 정신적 환경이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어떤 현안을 어떤 방식으로 분석하고 다룰 것인지, 사회적 아젠다 세팅을 위해 긴 호흡으로 준비해야할 것들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할 시간도 여력도 없다. 그렇게 여유부리다가는 여타 다른 방송들에게 베스트 인터뷰이를 빼앗기고, 뉴스 생산할 기회도 박탈당한다. 진지한 기획보다 재빠른 선점이 중요하고, 전화기 숫자버튼을 누가 더 빨리 눌러 원하는 인물에게서 인터뷰 약속을 받아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BRI@예컨대, 얼마 전에 지금은 무소속인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이 여당 내에서 처음으로 탈당을 시사했다. 모든 프로그램들이 염동연 의원을 향해 레이더를 뻗친다. 첫 번째 인터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쟁, 아니 전쟁인 셈이다(사실, 청취자들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요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의 관심은 단연 '뉴스 생산'이다. 대개 라디오, TV 할 것 없이 방송들은 신문 기사를 재가공해 생산해내는 2차 생산물들이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엔 순수한 '뉴스 생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역전됐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이 신문 기사의 아주 중요한 소스가 된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방송이 시작되기 전, 그 새벽 이른 시각에도 대여섯 곳의 일간지와 인터넷 신문사들로부터 그날그날의 출연자를 묻는 전화들이 걸려온다.
그리고 구미에 맞는 인물이 출연해 뭔가 새로운 내용이라도 언급했다 싶으면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화돼, 당장 그날의 석간부터 다음날 조간신문들까지 모두 그 방송과 방송에서 언급된 새로운 얘기들로 지면을 장식한다. 좀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동안 TV며 인터넷 환경에서 소외받아왔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존재감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인터뷰를 요청하는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해주는 사람 사이의 철저한 상부상조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여부를 떠나 라디오는 인터뷰이들에게도 기자들에 의해 분석, 혹은 일정정도 가공되는, 그래서 왜곡될 수도 있는 신문보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하여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뭔가 발언하고 싶거나, 홍보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 자신의 육성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 라디오, 그리고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송사 채널, 시간대까지 고려해가며 기꺼이 활용한다. 이른바 라디오 정치시대가 존재할 수 있게 된 메커니즘이다.
이른바 '라디오 정치시대'
하지만, 이런 구조는 종종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자괴감을 안겨준다.
언제부터인지 방송 가치의 초점이 일반 청취자들이 듣는 방송이 아닌 온통 사회적 화두와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떤 인물과의 인터뷰가 보다 화제가 될 수 있을지, 그 인물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말을 이끌어 내야 기사가 될 수 있을 지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만의 리그에 스스로 함몰돼 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청와대 국내 언론실에서 전화가 왔다. 방송사 시사프로그램 제작자들에게 청와대가 주재하는 정책설명회 겸 오찬을 계획하고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었다. 오늘 몇몇 PD가 그 모임엘 다녀와서 말들을 전한다.
'오프 더 레코드'라는 전제하에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이 열린우리당 탈당파 의원들과 여권과 야권의 향후 정계개편 향방에 대해 몇 가지 개인적인 언급들을 하더라고. 왠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동지의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꽤 허심탄회한 얘기들이더라고. 그런데, 모 방송사의 한 PD가 그것을 열심히 받아 적고 있더라고.
얘기 뒤끝에 우리의 관심사는 당연히 그 PD가 오늘 오찬에서 들은 내용들을 과연 기사화 시킬 것인가 아닌가에 집중됐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얘기라면 언론사들의 관심을 자극할 것임이 분명했고, 오직 오프 더 레코드를 지킬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그 PD의 판단만 남아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5시가 조금 지나자 기사가 올라왔다. '이병완 "탈당 의원들은 한나라당 2중대란 얘기냐"'라는 제목으로. 급했던 모양이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뉴스 유통구조는 대개 연합뉴스로부터 출발하는데, 조선일보에 첫 뉴스를 전할 기회를 준 것을 보면.
'기사선점'에만 매몰된 언론의 자화상
정치하는 사람들은 농담도 실수도 정치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언론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속성을 모를 리 없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알려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발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방송사 PD들과의 공식적인 오찬 자리에서 민감한 현안에 대한 얘길 하며 오프 더 레코드를 주문한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이미 갈 데까지 가 불편해진 지 오래인 당청관계의 한 단면일 뿐인 탈당 의원들에 대한 언급을 굳이 기사화한 것이나. 씁쓸한 에피소드다.
가치판단이야 기사를 접한 독자와 청취자들 몫이겠지만, 기사 우선주의에 매몰돼 있는 언론이 과연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나부터 우선 반성해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지연씨는 모방송국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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