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을 보지 않고 형식화된 종교성만 바라보는 결과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상숭배' 논쟁이라고 말하는 이찬수 전 교수.인권실천시민연대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유명한 라너는 스미스처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듬지 않으면서도, 결국 종교적 다양성을 긍정하는 신학적 이론 체계를 이끌어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한 가톨릭교의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구원'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가며 종교성의 핵심을 규정하는 중요한 명제로 간주된다. 그래서 흔히 '구원'은 선교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또는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기독교적 구원론은 지극히 협소할 뿐이며, 오히려 반(反)신론적인 접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하느님의 은총이 오직 예배당 안에만 갇힐 정도로 왜소하거나 초라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라너는 인간을 '차별 없는 은총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어떠한 조건 없이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이미'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고 보듯이, 모든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가든 그렇지 않든 다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다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이 교수는 이를 "그리스도적이긴 하되,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에도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이웃에 대한 철저한 자기 내어줌의 사랑은 그러한 실천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여기저기에 퍼져 있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감안한다면, 교회가 단순히 협소한 공간이 될 수도 없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구체화되는 모든 곳', 즉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을 갖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고 말한다. 만약 현재의 예배당들이 그런 '교회' 공동체라면, 그곳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거꾸로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이러한 라너의 신학에 대해 한스 큉(Hans Kung)은 '교회의 역사성을 무시한 신학적 기만'이라고 불쾌감을 나타냈고, 존 힉(John Hick)이나 니터(Paul Knitter)등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다른 종교를 평가하려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전 교수는 이러한 비판들이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를 확립"하려 했던 라너의 목적을 무시한 오해라고 말했다.
또한 이 전 교수는 라너가 교회의 역사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무시한 것도 아님을 강조했다. 오히려 "타종교인들을 가시적인 교회의 틀 안으로 몰아넣는 것이 교회의 과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게 진정한 교회의 과제"라는 것이다.
신학의 보편성은 신앙의 보편성에서 나와야
모든 사람들을 '익명'이라는 전제로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는 라너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 전 교수는 "라너가 이미 익명이라는 언어가 지니는 한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라너 스스로 그 용어를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체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佛者)라는 낱말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생생하게 살려내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익명의 불교인'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승인해야 하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한국의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이 이른바 타종교의 연구를 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대방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의 이면에 깔려 있는 유사한 종교적 지향과 믿음의 순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욱더 잘 이해하고 종교간 평화로운 공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조금만 알고 나면 타 종교의 신학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인간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라너의 신학은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侍天主)-하늘의 주인을 내 안에 모신다-와 일맥상통합니다."
신앙의 보편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종교간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세우는 한국 신학계의 폐쇄성과 획일화에 던지는 따끔한 일침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권연대 최철규 간사가 작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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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구원론은 오히려 반(反)신론적인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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