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34회

등록 2007.02.13 08:11수정 2007.02.1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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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여기저기에는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큰 충격이 있었던 것 같았다. 물론 사람이라도 진기를 실어 밟거나 찬다면 나무껍질이 벗겨지기는 하겠지만 이런 흔적은 남지 않는다. 그녀는 빠르게 몇 군데 나무를 따라 수피가 벗겨진 사실을 확인하고는 결국 예상했던 대로 그것은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사람 몸체만큼 큰 썩은 나무둥치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는 썩은 고목둥치를 던져 이리저리 나무에 맞고 튕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추적자의 이목을 흐려놓고는 그 순간 사라진 것이다. 전에도 이런 얕은 수작을 하는 자가 간혹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좀 더 멀리 도망갈 시간을 버는 경우도 있었다. 허나 복(蝮)의 추적을 피한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복(蝮)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BRI@이 썩은 나무둥치는 물을 먹어 사람보다 더 무거웠다. 단순히 던지는 것이라면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힌 인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리저리 튕기게 만드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상치 않은 자임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몸에 엄습해왔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놓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마지막 흔적이 있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사람인 이상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지금 부상자를 안고 있는 처지였다. 그녀는 그 자가 이 숲에 뛰어들어 잠시 머물러 피 냄새를 풍겨오던 곳으로 다가갔다.

‘이게… 도대체?’

그녀는 잠시 당황했다. 분명 흔적은 있었다. 그 자는 바로 이곳에 있었고, 아직도 피 냄새가 남아있었다. 문제는 주위를 아무리 조사해 봐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땅으로 꺼졌거나 아니면 하늘로 치솟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공이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한걸음에 삼장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제자리에서 몸을 날린다면 이장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녀는 전문가였다. 흔적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없었다. 결단코 흔적은 아무 곳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자는 이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

헌데 그녀의 뇌리에 하나의 생각이 스치는 순간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자신이 쫓는 상대는 무서운 자였다. 그냥 무서운 자가 아니라 정말 무서운 자였다. 무섭도록 치밀한 두뇌를 가진 자였을 뿐 아니라 겁이 덜컥 날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녀의 가슴이 서늘해왔다.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엄청난 상대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갑자기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눈이 주위를 훑는 그 때 그녀의 뇌리 속에는 아주 불가능한 광경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 무서운 자는 부상당한 사내를 안은 채, 적당한 크기의 썩은 나무둥치를 한 손으로 들어올린다. 물을 먹어 적어도 이백오십 근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나무둥치를 가볍게 집어 들고는 마치 돌멩이 던지듯 가볍게 앞으로 던진다.

동시에 그는 몸을 날려 날아가는 나무둥치에 몸을 싣고 고의적으로 이 나무에서 튕겨 저 나무로, 그리고 몇 번 더 그렇게 튕기게 만든 다음에 썩은 나무둥치를 버리고는 훌쩍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얄팍한 수법으로 추적자의 이목을 흐리려 한다는 사실을 뇌리 속에 각인시켜 놓고는 그것을 또 다시 교묘하게 이중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녀는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였고, 상대의 술수에 그대로 놀아난 꼴이었다. 그녀는 상대가 기대했던 대로 소리를 내고 이목을 끌게 했던 것이 썩은 나무둥치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얕은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래 그 자가 머물던 자리까지 왔으며 흔적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맸다. 그리고 그 썩은 나무둥치가 그저 이목을 끌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해 내고는 이제 다시 그 썩은 나무둥치가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달려가 거기서부터 다시 추적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 자는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었고, 흔적을 없앨 수 있는 시간도 벌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아니 한 수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 위에서 자신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자였다. 만약 그 자가 함정이라도 파고 기다렸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그 자의 손아귀에 잡혀있을 터였다.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 자를 더 이상 추적하면 안 된다고 본능은 계속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일접이 특히 강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전제하에 시시각각 그녀의 행로에 그들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음호를 남기기로 결심했다. 죽는다 해도 어느 정도는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추적하는 자가 무서운 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정보는 충분할 것이었다. 이 결정이 최선이었다. 다행인 것은 상대가 이 운중보를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 자가 운중보에 있는 한, 아니 설사 그 자가 운중보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녀는 중원 끝까지 추적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그 자를 추적하기로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러고 나니 그녀는 다시 차분하고 냉정한 추적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고, 곧 그 자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확실히 치밀하고 무서운 자다.’

추적자를 혼란에 빠뜨리게 해놓고 숲을 빙 돌아 오히려 상대는 다시 숲을 빠져나갔다. 그녀 역시 상대가 남긴 흔적을 찾고 방향을 추적하는데 애를 먹었다. 방향은 북쪽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기었다. 그녀를 도와주는 것은 두시진 전까지 내렸던 비였다. 마른 땅보다는 흔적을 찾기 쉬었고, 피 냄새도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강남(江南) 특유의 정원 양식으로 꾸며진 운중보는 아주 오밀조밀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은밀하게 움직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기기묘묘한 형상을 한 와송(臥松)과 다양한 꽃나무들은 그녀가 몸을 숨겨 이동하는데 아주 적절한 은폐물이 되었다.

그녀가 와송 두 그루를 안은 듯한 바위를 타고 돌았을 때였다. 조그만 연못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는데 갑작스럽게 그녀의 고막을 후비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웬 놈이냐?”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카랑카랑한 중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흠칫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자세히 지켜보지 않으면 아무리 안력과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물도 발견해 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발각된 것이다.

‘귀찮게 됐다.’

아마 오늘 경비를 서는 인물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자신이 실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재수가 없는지 자꾸 일이 꼬이고 있었다. 그녀는 일단 나무들 사이를 누비며 빠르게 움직였다. 귀찮은 자를 따돌려야 했다.

그녀는 빨랐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한 그녀를 따라잡을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이 상대적이라는 단순한 이치를 잠시 잊어버린 그녀의 실수였다. 아무리 빠른 자라도 더 빠른 자를 만나면 느린 사람이 되는 법이다.

“학!”

그녀는 나무를 타고 기어오르다 갈퀴 같은 손아귀에 발목을 잡혔다고 느끼는 순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이런 돌연한 사태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왼팔이 뒤로 비틀려 꺾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목에 힘이 들어간 팔뚝이 감겨왔다.

땅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왼팔은 등 뒤로 꺾이고, 척추를 짓누른 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팔이 목을 감아오자 그녀는 숨이 턱 막히며 경악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척추가 부러질 듯 맹렬한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고통보다 상대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이토록 순간적인 몸놀림이 빠른 인물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발각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무조건 달아났다면 아마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를 현혹시켜 주의를 분산케 하고 다른 곳으로 유인해 떨쳐버린 다음 추적을 계속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모르고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 상대는 이 운중보 내에서 순간적인 움직임이 가장 빠르다는 호조수(虎爪手) 곽정흠(郭晸歆)이었던 것이다.

“이런? 계집이로군.”

목을 감으며 스치는 가슴에서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자 곽정흠은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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