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35회

등록 2007.02.14 08:32수정 2007.02.1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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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콜록….”

숨은 쉴 수 있게 되자 막혔던 기도(氣道)가 뚫리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무릎으로 척추를 누르고 있는 것은 여전해서 맹렬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BRI@“네 년은 누구지? 무엇 때문에 이 야밤에 배회하고 있는 것이지?”

그녀는 당황했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상대에게 제압된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제압당할 때까지 상대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지?”

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벗겨내자 탐스런 머리칼이 풀어져 내렸다. 그리 미인은 아니었지만 피부는 까무잡잡했고 탄력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최대한 도리질치려 했지만 죄어오는 팔에 의해 다시 숨이 턱 막혔다.

“처음 보는 년이군. 나는 지금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어. 오히려 네 년이 대답하지 않았으면 해. 네년이 대답하지 않으려고 그럴수록 나는 아주 흥미로운 구경을 할 수 있거든.”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곽정흠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왠지 능글맞은, 그러면서도 알지 못할 불안감이 엄습하게 만드는 말투였다.

“내 수하 중엔 계집을 아주 잘 다루는 사람이 있지. 그는 가끔 나에게 농담처럼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 아직 여자를 다루면서 해보지 못한 일이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여자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자극할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능글맞게 변했다.

“바로 계집을 홀딱 벗겨서 거꾸로 매달고 싶었다는 거야. 대답을 하지 않으면 네가 그 꼴을 당하고 싶다는 뜻이라 생각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주는데 나는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아.”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것은 곽정흠의 협박이 먹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순간 그녀는 한 인물의 이름을 떠올렸다.

‘호조수 곽정흠!’

왜 진즉에 이 인물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마 상황이 너무 다급하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헌데 그 때였다.

“그녀는 복(蝮)이라 불리는 여자요.”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며 아주 잘 생긴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만보적 상대인의 일접사충 중 하나?”

나직하게 뇌까리는 곽정흠은 약간은 실망스럽다는, 그리고 한편 그녀의 예상대로 약간은 미안하다는 기색이 섞여있었다. 뭔가 건수를 잡았는데 전혀 아니었다는 실망감과 미처 만보적 상만천의 수하를 알지 못하고 건드렸다는 곤혹스러움 때문인 것 같았다.

이미 상만천 쪽에서 경비를 서는 수뇌부인 엽락명과 자신에게 은근히 통보해 온 바가 있었다. 일접사충이 움직이더라도 못 본 체 해 달라고. 만보적이 굳이 그렇게까지 부탁을 했는데 얼굴을 가린 두건까지 벗기고 깔아뭉개 놓았으니 조금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는 아직 제압된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려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헌데… 둘째 공자가 아니시오? 이 밤중에 공자께서 어쩐 일이시오?”

나타난 인물은 바로 보주의 둘째 제자인 옥기룡이었다. 옥기룡은 곽정흠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말씀을 드리자면 길어지오.”

말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함정을 파놓고 혈간을 시해한 흉수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정작 온 흉수 놈을 눈앞에서 놓치고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기로 하고 그녀를 제게 넘겨주실 수 있겠소?”

호조수 곽정흠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궁리하던 중인데 옥기룡이 넘겨 달라니 너무나 잘된 일이었다. 허나 곽정흠은 그런 내색을 남이 알게 만드는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저분의 말씀이 맞느냐?”

곽정흠은 그녀의 목을 옥죄었던 팔을 슬그머니 풀면서 물었다. 그녀가 막혔던 숨통이 트이자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곽정흠의 말투가 변한 것을 느낀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은근히 지금까지 당한 것에 대해 화가 치밀어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요.”

“쯧… 진즉에 말했다면 조용히 타일러 보냈을 터인데….”

밤늦게 몰래 돌아다니는 것이 일인 그녀가 쉽게 자신의 신분을 토로할 수 있을까? 그녀의 등을 타고 눌렀던 몸을 일으키며 비틀어 꺾었던 그녀의 팔을 풀며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완맥 만큼은 놓지 않았다.

“앞으로도 조심하거라. 이 운중보는 너 같은 아이가 함부로 쏘다닐 곳이 못된다.”

경비책임자로서 하는 점잖은 경고였다. 앞으로도 경거망동하며 돌아다닌다면 무조건 봐주지는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공자께서 이 아이가 필요하시다니….”

곽정흠은 일부러 말을 흐리며 잡고 있던 그녀의 완맥을 바라보았다. 제압된 상태 그대로 넘겨받을 것이냐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순순히 곽정흠이 자신에게 넘겨준다고 하자 옥기룡이 가볍게 예를 표했다.

“고맙소. 나는 저 아이가 내 눈앞에서 도망가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 믿소. 아직까지 내가 죽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내 검보다 빠른 인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오.”

그 말을 들은 곽정흠은 내심 씁쓸했다. 그 말은 이 아이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부인할 것도 아니었다. 선풍검(旋風劍)의 검은 일단 한 번 휘몰아치면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고 들었다.

‘혈간의 죽음으로 한풀 기세가 꺾일 줄 알았더니 건방진 것은 여전하군. 그런데 급하긴 정말 급했던 모양이군.’

옥기룡이 자신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고 느낀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래도 예의상 완맥을 놓기 전에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옥공자의 말에 따르도록 해라. 네가 경거망동하여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나 역시 상대인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진다.”

그녀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경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은근히 옥기룡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었다. 사실 옥기룡에게 넘기는 순간부터 자신의 책임은 사라지는 것이다. 옥기룡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몇 마디 물어보고 돌려보낼 것이오.”

“뭐… 그야 둘째 공자께서 알아서 하시지 않겠소? 그럼 본인은….”

복의 완맥을 놓고 곽정흠이 포권을 취하자 옥기룡 역시 마주 예를 취했다. 그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운중각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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