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기룡은 곽정흠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쫓던 그 자는 어디로 갔느냐?”
@BRI@옥기룡은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자를 뒤쫓아 오고 나서 옥기룡이 뒤늦게 추적해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그만 소란이 일자 잠시 지켜보다가 나타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래도 이곳까지 온 것은 꽤 정확하게 추적한 셈이었다.
“……!”
옥기룡은 정말 잘생긴 사내였다. 소문은 무성했지만 이리 마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옥기룡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도 여자였다. 사내에게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던 그녀였지만 옥기룡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왠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만의 달콤한 느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네가 세 시진 동안 백호각에 스며들어 지켜보아서 알겠지만 나는 네가 충분히 생각하고 둘러댈 대답을 기다릴 만큼 한가롭지 않다.”
그 말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옥기룡은 자신이 백호각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을 쓰지 않고 봐주었다는 의미가 강했다. 옥기룡의 눈에 초조함과 더불어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대답을 끌거나 잘못하면 바로 베어버리겠다는 기색도 엿보였다.
“나 역시 몰라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옥기룡이 한 발자국 그녀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한 발자국이라고 했지만 일장 정도 떨어져 있다가 어느새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위협을 느낀 그녀가 변명하듯 다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
“숲에서 그 자의 술수에 말려 놓쳤다가 이곳까지 흔적을 보고 추적해 온 거예요.”
“여기까지는 정확한가?”
“그래요.”
“나는 만보적 상대인의 수족인 일접사충이 추적의 달인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특히 야간추적에 있어서는 네가 최고라 하더군.”
분명 칭찬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칭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꾸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옥기룡의 너무나 잘생긴 얼굴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
“너는 나를 도와 그 자를 추적할 수 있겠느냐?”
그 자를 추적하는데 자신을 써먹겠다는 의미였다. 마음 같아서는 옥기룡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 자를 추적해야 한다는 목적도 같았지만 이런 부탁을 들어주면 나중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자를 추적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부탁은 대개가 심각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일이었고, 추적이 끝나게 되면 길잡이로 사용했던 추적자는 거추장스런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죽음뿐이었다. 물론 상만천이 버티고 있는 한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자신이 본 것을 오히려 보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거추장스런 제약이 따르게 될 터였다.
그녀는 짧은 순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망설였다. 그녀의 뇌리 속에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위험한 순간에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자를 계속 추적하려면 옥기룡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 옥기룡은 자신이 따로 그 자를 추적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추적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그녀들에게 절대 지켜야 할 규칙을 어길 수 없었고, 그 규칙을 어길 경우 주인인 상만천이 용서를 한다하더라도 그녀에게는 일접이란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아요.”
옥기룡의 쭉 뻗은 검미가 치켜 올라갔다.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목숨을 어리석은 고집으로 헛되게 버리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나는 네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길 바라고 있다.”
이것은 협박이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였고,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단호하고 섬뜩한 위협이었다.
“주인의 허락을 받는다면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너의 구구절절한 변명을 들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고 경고했다. 죽겠느냐? 아니면 나를 위해 그 자를 추적하겠느냐?”
그녀는 옥기룡을 바라보았다. 이미 백호각의 상황을 지켜본 그녀로서는 옥기룡이 다급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을 죽일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과 옥기룡이 같이 있다는 사실을 곽정흠이 알고 떠났다.
자신이 죽는다면 누가 죽였는지 금방 발각될 것이고, 자신과 같이 보잘 것 없는 목숨 때문에 자신의 주인인 만보적 상만천과 공공연하게 적이 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옥기룡은 그 자의 정확한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그녀가 필요할 것이지만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고 죽일 이유까지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제는 단호한 대답과 동시에 적당한 구실로 이 자리를 뜨는 게 필요했다.
“대답은 여전히 같….”
그녀는 다소 여유를 찾으며 대답을 했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기룡의 착 가라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죽어야지.”
그 순간 복은 옥기룡의 말이 단순히 협박이 아님을 퍼뜩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 퍼진 미세한 살기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옥기룡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 소름이 쭉 끼치며 그러한 사실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 있었던 자세 그대로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그녀의 등이 땅에 닿으려는 순간 몸을 돌려 납작 엎드리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른 몸놀림으로 좌측으로 튕겨나갔다.
도망을 하려는 자는 몸을 돌려 뛰거나 위로 날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 오히려 상대의 공격에 등이 비는 데도 말이다. 따라서 그녀의 움직임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도망을 가는데 아주 효과적인 몸놀림이었다.
“어리석은 년이군.”
그 음성은 꿈결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허리에 바늘로 찔린 듯한 찌릿한 느낌이 들면서 온 몸이 마비되었다. 고통은 나중에 밀려들었는데 그 고통을 느낄 즈음 다행스럽게 그녀의 사고(思考)는 정지되고 있었다. 그녀의 뇌리에 마지막 떠오른 것은 ‘왜 옥기룡이 앞으로 닥칠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일까?’ 하는 거였다. 그녀는 해답을 찾지 못하고 죽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옥기룡의 처지가 그만큼 다급하고 여유가 없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리고 겉보기와는 다르게 매우 냉정하고 잔인한 성격임을 진즉에 알았어야 했다.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차지하는 데 익숙한 그는 남에게 표출하는 적이 거의 없었지만 이처럼 충동적이고 매우 잔인한 면이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옥기룡은 밝고 쾌활한 모습 안에 음울한 성격이 자리하고, 예의바름 뒤에 남을 깔보는 거만함이, 인내심이 무척 강해 보이는 반면에 어느 순간 돌변하여 충동적인 광기를 뿜어내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갑자기 기분 나빠질 때 아무라도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충동적인 살인욕구를 가진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이 원했던, 그리고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이 틀어졌을 때 더욱 충동적이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타인에게 돌려버리는 자신도 모르는 습관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백호각에 잠입해 있을 때부터 죽일 것인지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던 것을 모른 것이 결정적 실수였고 어리석게 개죽음을 당했다.
옥기룡 역시 개운치는 않았다. 초조한 마음이었고,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었던 때에 재수 없게 걸린 것이 그녀였다. 어쩌면 후에 자신에게 커다란 걸림돌이나 험난함을 가져올 수도 있는 상만천을 적으로 만드는 단초가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후회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복의 시체를 발로 차 연못 속으로 집어넣었다.
시체가 발견되어도 상관없었다. 사인은 그리 쉽게 밝혀낼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에게 복을 넘겨준 곽정흠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한 것이란 자신도 있었다. 복의 시체가 연못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는 곧 조금 전의 더러운 기분을 마음에서 털어버렸다.
‘운무소축인가? 아니면 생사림인가?’
그는 전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은 두 곳뿐이었다. 우슬이 머물고 있는 운무소축과 산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통로인 생사림이었다. 그러기에 망설임 없이 복을 죽여 버렸는지 몰랐다. 그는 천천히 흔적을 찾으며 추적하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설 연휴를 맞이하여 즐거운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설 연휴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며칠 연재를 쉬겠습니다. 내일(16일)부터 20일까지 쉬고 다음주 수요일(21일)부터 137회가 연재됩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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