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바위는 서있는데 계절은 비어있네

'늘근백수'의 객쩍은 산 오르기(記) ①

등록 2007.02.14 11:49수정 2007.02.1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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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날씨는 우울했다. 겨울은 때가 오기도 전에 이미 퇴각해버린 듯했고 봄은 아직 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어 계절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계절의 틈바구니로 하늘은 젖은 빨래처럼 낮게 드리워 날씨는 우울할 뿐만 아니라 음습하기까지 했다.

@BRI@사당에서 관악산 가는 길도 비어 있었다. 날씨 탓인지 여느 때 미어지던 등산로는 사람 듬성듬성 보이고 간간이 안개까지 숨어 있어 적적했다. 여섯 명의 '늘근(늙은의 고어)백수'들은 일렬종대로 서서 초반부터 숨을 헐떡이며 관악산의 초입을 부지런히 접어들었다.


길은 때론 질척거렸고, 때론 미끄러웠고, 때론 먼지가 풀썩거리기도 했다. 주 한 번 하는 산행이고 사당-연주대 코스는 수십 번도 더 와본 곳이기도 하지만 산에서의 길은 매번 낯설었다. 봄 다르고 여름 다르고, 눈 오는 날 다르고 비 오는 날 다르고, 바람 부는 날 다르고 안개 낀 날 달랐다.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날, 비 오는 것도 아니고 햇볕 쨍한 것도 아닌 날, 우리들은 그렇게 낯설어하며 관악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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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한 4, 50분 걸었으려나, 마당바위 못 미쳐 작은 봉우리에 멈춰 서서 숨을 돌렸다. 사당-연주대 코스 중 가장 볕 바르고 아늑하고 전망 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남모르게 거대한 남근바위가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이쪽을 지날 때는 자주 이곳에서 쉬는 터였다. 그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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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사당에서 출발하여 관악산 연주대를 향하여 훠이훠이 올라가다 보면 마당바위 조금 못 미쳐서 자그만 봉우리에, 혼자 누워 있는 아니 서(?)있는 이 거인을 만날 수 있다.

겨울이면 햇볕이 따뜻하고 여름이면 바람이 시원한 곳. 앞뒤 사방이 트여 멀리 서울부터 경기도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 산 등성이들이 소 잔등처럼 굽이치고 나무들이 울울히 임립하여 산새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그것을 하늘 아래 드러내놓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거풍을 시키고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은 더러 못보고 그냥 가기도 하고, 더러 보고도 못 알아보고 그냥 가기도 하고, 더러 알아보고 히죽이 웃으며 쳐다보기도 하고, 더러는 얼굴 붉히며 외면하는 척하기도 하고, 어제 본 아줌마 등산객은 '아이구 실하게도 생겼네'하며 품에 안을 듯이 기꺼워하기도 하고, 생을 제법 아는듯한 중년 사내는 '정말 뭣같이 생겼네'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지나간다.


그래 정말 내가 봐도 뭣같이 생겼다. 이제는 너무 자주 들어 욕같이 들리는 말. 그 말이 이 산속에서 이렇게 딱 맞을 줄이야.

나는 요새 뭣같이 살아가고 있다...



라고 몇 년 전에 읊었던 그 바위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바위 곁에 선 나무는 남근바위의 기를 받아선지 관악산에서 유일하게 가지에 물이 올랐다. 계절은 그곳에만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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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마당바위를 지나서 연주대, 연주암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늘근백수'들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한바탕 입씨름을 벌렸다. 벼랑을 타고 연주대로 넘어가자는 축과 옆길로 안전하게 연주암으로 빠지자는 의견이 언제나처럼 팽팽히 엇갈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각자 좋은 데로 가서 연주암에서 만나기로 결정하였다. 3명은 연주암 3명은 연주대였다. 원 늙은이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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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관악문을 빠져나갈 즈음 하늘은 더욱 낮아지더니 때늦은 매화의 낙화처럼 한 잎씩 눈을 날리게 했다. 굵은 송이로 편편이 날리는 눈에서는 매화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비어 있는 관악산에서의 계절에 그것은 아직 겨울이 가지 않았다고 떼쓰는 아이의 작은 주먹처럼 앙증맞고 가여웠다. 그러나 그뿐 그것들은 지상에 닿자마자 덧없이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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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흔적도 없이 낙화가 스러진 바위를 줄에 의지하며 기어올랐다. 벼랑은 가팔랐으나 못 오를 만큼 험하지는 않았고 눈 몇 줄금 뿌렸으나 바위를 젖게 하지는 못하였다. 벼랑을 올라채니 연주대가 바로 거기였다. 산새 몇 마리 바위에 걸터앉아 먹이를 던져줄 사람을 기다릴 뿐 연주대 또한 적적하였다. 시계는 낮 1시 10분. 사당을 출발한 지 1시간 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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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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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연주암으로 내려와 '늘근백수'들을 다시 만나 간식을 하고는 터덜터덜 과천으로 향하는 지겨운 돌계단을 밟으며 하산했다. 과천에는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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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작은 밥집을 찾아 들어가 빈속에 소주를 쏟아부으니 실비는 내 가슴속에서도 덩달아 내렸다. 늙어 일터에서 튕겨나온 우리들의 인생에도 이제 계절은 비어 있었다. 겨울은 때가 오기도 전에 이미 퇴각해버린 듯했고 봄은 아직 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계절이 비어 있는 관악산은 쓸쓸하였다.

계절이 비어 있는 삶 또한 쓸쓸할 터. 눈 몇 송이 날린다고 겨울이라 우길 수 없고 실비 어깨를 적신다고 다 봄이라 부를 수 없음을 알아버린 나이이기에 더욱 그러할지니.

이제 돌아가서 남근바위처럼 거풍이나 하고 잠이나 자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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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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