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 신화가 된 노예

[서평]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엿보는 로마

등록 2007.02.14 14:16수정 2007.02.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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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끝났다. 피로 물든 계곡에서, 주인을 잃은 말 한 마리가 달아난다.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새로운 날이 열리는 여명이다. 공허하고 비통하다. 죽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널브러져 있다. 무기들도, 그것을 휘둘렀던 사람들처럼 싸늘하게 놓여 있다. 깊은 고요가 흐른다. 죽음의 고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들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손에는 아직도 칼자루가 쥐어져 있다."

이렇듯 커크 더글러스의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년)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스파르타쿠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재구성해보는 로마의 역사이다.


르네상스 이후, 고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온 먼지 속에는 검투사가 된 노예, 반역자가 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관심도 생겨났다. 키케로, 살루스티우스, 리비우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누스, 파테르쿨루스, 플로루스, 프론티누스, 아테나이오스, 오로시우스 등의 기록을 통해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누스가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려준다.

이 책의 저자는 로마 역사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스파르타쿠스의 삶을 재구성해본다. 하지만 기록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 또는 서로 상반되는 내용은 역사를 전공한 작가의 상상력을 총 동원해 당시의 시대상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재구성한다. 때문에 이 책에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의 인용과 더불어, '아마도'라는 표현이 눈에 많이 띈다.

스파르타쿠스의 출생에서부터 검투사들이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 어떤 동작을 익혔는지, 검투사에는 어떤 종류가 있었는지, 싸움에서 진 검투사를 어떻게 죽였는지. 또 반란을 일으킨 후 노예들이 모여들었다는 베수비우스 산의 지형은 어떠했는지, 스파르타쿠스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식량과 일용품들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었는지, 로마 군사들과의 전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실로 엄청난 정보가 이 책에 들어있다.

저자는 스파르타쿠스가 로마 군대의 지원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레 주장한다. 당시 로마 군대에 들어가는 방법에는 지원병, 징병, 대리군인 3종류가 있었는데, 스파르타쿠스는 지원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로마 군대를 탈영한 후, 트라키아의 산악지대에서 도적으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실제로 투기장에서 싸웠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투기장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았으며, 그 훈련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검투사들은 사회 계층의 맨 밑바닥이었다. 자살자, 매춘부와 뚜쟁이, 검투사는 공동묘지에 매장도 거부되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던 명백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 중 대부분이 출신 성분부터 로마 사회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노예라는 점이다.


로마의 노예제도


노예제도는 인류의 전쟁과 함께 한다.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고,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를 죽이지 않고 노예로 부려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노예제도가 생겨났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노예제도는 전쟁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아니, 노예를 더 많이 잡아오기 위해 전쟁을 하기도 했으니, 전쟁의 목적 중 하나라 할 수도 있겠다.

역설적이게도 노예제도는 '민주주의'가 꽃핀 아테네에서 가장 발전했는데, 아테네 인구수와 거의 맞먹는 수십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의 뒤를 이은 로마제국 역시 전쟁을 자주 치러 노예제도가 엄청나게 성행했다. 로마의 '대토지소유제도'는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노예는 신분의 상징이었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대충 3명 정도의 노예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예를 한 명도 두지 않는 사람은 그야말로 빈곤에 찌든 이들이었다. 로마의 노예 정책은 매우 잔인했다. 모든 노예들은 법적으로 '물건'이었다. 하지만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예상외로 훨씬 더 다양했다고 한다. 주인과 노예 간에 돈독한 우정이 생겨 주인이 노예를 풀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집에서 일하는 노예들에 한정된 것이고, 광산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고 한다.

"농업노예로의 좌천은 그래도 가장 약한 처벌이었다. 그보다 더 나쁜 처벌은 에르가스툴룸이었다. 힘든 노동이 강제되는 감옥이었다. 그리고 신체부위를 차례차례 절단하는 형벌도 있었다. 흔히 투기장에서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노예는 서서히 죽어갔다."(145쪽)

노예제도의 발전은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켰고, 결국 노예의 대반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스파르타쿠스보다 먼저 시칠리아에서 노예 폭동이 두 차례 일어났다. 최초의 시칠리아 노예 반란의 연대기는 정확하지 않다. 두 번째 노예 봉기는 첫 번째 봉기에 자극받아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로마가 목격한 마지막 노예 봉기였다. 고대의 노예는 우리가 근대 산업 혁명의 연료로 사용한 석탄과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는 석탄 대신에 노예라는 인간을 불태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2년 반 만에 끝나게 된다. 아니, 2년 반씩이나 지속된다. 당시 로마의 정치조직은 상당히 복잡했고, 바로 그 때문에 로마인들이 스파르타쿠스의 진압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잔혹성에 관한 묘사가 보인다.

"열 명 중 한 명을 죽이는 행위는 전쟁터에서 패배한 군사들에 대한 처벌이었으나 그 잔혹한 관습은 한때 폐기 처분 되다시피 했었다. 전쟁에서 패하는 죄를 범한 보병대들은 제비를 뽑았고, 그렇게 하여 열 번째에 걸리는 병사들이 나머지 겁쟁이들을 위해 상징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크라수스가 이런 방식으로 죽인 병사들이 수천 명에 이른다."(294쪽)

그렇다면 스파르타쿠스는 어땠을까?

"혹시라도 자신의 병사 중에서 동요하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의 방어선 앞의 열린 공간에서 죄수를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자신의 결단을 더 강하게 다지곤 했다."(307)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스파르타쿠스의 죽음과, 살아남은 노예병사들의 십자가형으로 끝난다.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평가

스파르타쿠스를 소재로 한 작품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 진 것은 1760년이었다고 한다. 베르나르 소랭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위대한 사나이를 불러내고 싶었다. ...정의와 인간애가 넘치는 영웅적인 사나이의 자질을 두루 갖춘 사나이를..., 인생 역정에서 겪은 불행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인 미덕으로 유명해진 한 사나이를 다시 살려내고 싶었다. 그의 진짜 목표는 노예제도의 폐지였다. 그 쇠사슬을 그가 끊었다."(366페이지)

스파르타쿠스의 이런 이미지는 2세기가 지난 후,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 <스파르타쿠스>에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노예제도의 사악함을 말해주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스파르타쿠스 추종자들이 자행한 살육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모든 학정에 맞서 싸우는 자유의 우상이 되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스파르타쿠스를 프롤레타리아의 영웅으로 선택했을 때, 좌파 이데올로기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스파르타쿠스는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해 정치적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이 책의 저자는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린다.

"스파르타쿠스는 시대를 앞서 태어난,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사회주의자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전리품을 똑같이 나눠가졌으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과도한 약탈을 막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298쪽)

"우리가 가장 높이 숭배하는 것은 용기와 영감이다. 왜냐하면 냉소적이고 세속에 밝은 우리들에게는 영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천 년도 더 전에, 그런 영웅이 압제를 뚫고 일어섰다.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찾아서 폭정에 도전하면서. 그가 바로 스파르타쿠스였다."(376)

스파르타쿠스 - 신화가 된 노예

M. J. 트로우 지음, 진성록 옮김,
부글북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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