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것은 소중한 것이여"

이리향제줄풍류, 우리 가락을 지키기 위해 '찾아가는 연주회' 실시

등록 2007.02.20 21:34수정 2007.02.2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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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찾아가는 중요무형문화재 공연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찾아가는 중요무형문화재 공연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 오명관


지난 15일 오후 3시, 설을 앞두고 익산에 있는 동그라미 재활원에서 이리향제줄풍류 회원들의 공연이 있었다.


옛부터 풍류객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기 위해 합당한 공간이 필요했다. 대개 신분상으로 양반이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풍류객의 사랑방이나 별채, 또는 정자 등이 이러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를 ‘풍류방’이라 하였다. ‘풍류방’은 어느 정도 지적 교양을 갖추고 풍류를 애호하는 양반과 중인지식층의 사람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고 교류하는 공간에서 행해지던 음악이었다. 이러한 공연을 장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주하게 된 것.

우리의 옛 가락이 젊은층의 외면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이리향제줄풍류는 흔히 말하는 '찾아가는 콘서트'처럼 어느 곳이나 찾아가 공연을 펼친다.

a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회원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회원들 ⓒ 오명관


장애인들은 가야금에서 나오는 선율과 아쟁 등의 노래 가락을 마치 궁중연회에 참석하여 풍류를 즐기듯 감상했다.

비록 1시간여 동안 펼쳐진 공연이었지만 애절한 우리의 가락과 신명나는 사물놀이를 통해 우리의 음악을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우리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노인들의 연주를 보며 역시 한국 사람임을 되새기는 듯 했다.

또한 이리향제줄풍류는 지난해 말에 캄보디아에 찾아가 공연을 한 바 있어 우리의 음악도 세계화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a 채규환은 이리율림계의 산파역할을 한 율객이다. 이리율림계가 활발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율림계의 1대 회장이며 풍류방의 주인이었던 채규환의 공헌이 크다.

채규환은 이리율림계의 산파역할을 한 율객이다. 이리율림계가 활발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율림계의 1대 회장이며 풍류방의 주인이었던 채규환의 공헌이 크다. ⓒ 이리향제줄풍류

이와 같이 명성이 높은 대가들의 참여로 율객들의 사기가 고조되어 정식으로 풍류모임을 구성하는 데 뜻을 모았다. 마침내 1958년 10월 12일에 이리시(현 익산시) 중앙동 채규환씨 댁에서 풍류모임인 ‘이리율림계’를 결성하고 채규환씨가 회장을 맡았다. 채규환씨의 사랑방은 이리율림계의 지속적인 발전에 이바지한 풍류방이 되었다.

a 사진 속의 인물은 초창기 회원들. 뒷줄 왼쪽부터 황상규, 김필용, 진종하, 김용세, 이창수, 강낙승, 강산기, 이보한이고, 앞줄은 왼쪽부터 박윤창, 채규환, 양기준, 진양수, 김용희이다.

사진 속의 인물은 초창기 회원들. 뒷줄 왼쪽부터 황상규, 김필용, 진종하, 김용세, 이창수, 강낙승, 강산기, 이보한이고, 앞줄은 왼쪽부터 박윤창, 채규환, 양기준, 진양수, 김용희이다. ⓒ 이리향제줄풍류

이리율림계의 활동이 활발하게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1968년 9월 10일 전라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이리정악원(裡里正樂院)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초대 원장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성철(金聲喆)씨가 피선되었고 기악인 영산회상 및 성악인 가곡ㆍ가사ㆍ시조의 보급 책임자로 청파 강낙승선생이 선임되었다.


이리정악회(裡里正樂會)는 이리정악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하거나 사망으로 인하여 풍류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회원들의 수가 급격히 줄고, 풍류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가 겹쳐 풍류모임의 유지가 아주 어렵게 되어 남아 있던 소수의 율객들이 풍류를 지키고 전승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뭉쳐, 1972년 6월 11일 ‘이리정악회’라는 새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a 현 이리향제 줄 풍류 회장인 이정호 씨

현 이리향제 줄 풍류 회장인 이정호 씨 ⓒ 오명관

1987년 11월 11일 이리향제줄풍류는 문화공보부로부터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3-나호로 인정을 받으면서 이리정악회는 ‘이리향제줄풍류 보존회’로 명칭을 바꾸어 등록하였다. 이후 매년 정기연주회를 비롯, 지역사회의 많은 행사에 참여하여 이리향제줄풍류를 연주해왔다.

이리향제줄풍류의 악보는 1988년에 보유자인 강낙승 선생의 편저로 가야금ㆍ양금ㆍ거문고ㆍ단소의 악보가 합본으로 출판되었다. 『향제줄풍류보』(鄕制줄風流譜)라는 이름으로 편찬된 이 악보는 보유자 강낙승 선생이 1960년대에 기록해 둔 악보를 저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

a 강낙승 선생이 1960년대에 기록해 둔 악보 양금, 단소, 가야금, 거문고 악보

강낙승 선생이 1960년대에 기록해 둔 악보 양금, 단소, 가야금, 거문고 악보 ⓒ 이리향제줄풍류

거문고ㆍ가야금ㆍ양금ㆍ단소의 네 악기의 풍류를 다스름에서 굿거리까지 기록해 둔 악보인데 『향제줄풍류보』와 대동소이하나 특이한 점은 정간보를 가로로 기록하고 한 줄 한 줄 오선보로 역보해 둔 점이다.

국립국악원 줄풍류는 국립국악원 뿐만 아니라 각 대학교에서 교과과정으로 채택되어 전승되고 있으나 향제줄풍류는 이것을 가르치는 학교도 없고 또 지방 풍류방에서도 배우는 이가 없어서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있었다.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정읍ㆍ대전ㆍ대구ㆍ이리(현 익산)ㆍ흥덕ㆍ부산ㆍ공주ㆍ수원ㆍ안성ㆍ경주ㆍ진주 등 수많은 지역에 풍류방이 있어 율객들이 자주 줄풍류를 연주하였으나 1960년대부터 각 지방의 율계(律契)는 차츰 해산되어 이리와 정읍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서 줄풍류의 전승이 끊어졌다.

불과 30년정도의 짧은 기간에 모든 지역에서 줄풍류의 전승이 끊어져 버린 것을 볼 때 정읍과 이리에 남은 풍류의 전통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위기에 있었다.

현재는 이리(현 익산)와 구례(전남) 딱 2곳에서만 전승되어 오고 있다.

(줄 풍류에 관한 자료는 현 이정호 회장의 허락을 받아 남상숙 원광대 국악과 교수의 논문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첨부파일
omg71_346339_1[1].wmv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익산시민뉴스, SBS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익산시민뉴스, SBS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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