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무게 중심은 어디로 흘러가나

[태종 이방원 44]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해

등록 2007.02.21 10:05수정 2007.02.21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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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식을 마친 이성계는 이튿날 밀직직지사 조반을 명나라에 파견했다. 고려를 멸하고 이성계가 등극했다는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 하기 위해서다. 세계의 정복자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붙이고 중원을 거머쥔 주원장이 금릉에 똬리를 틀고 앉아 대륙을 호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를 멸망시킨 신생국에게는 대명외교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사흘째 되던 날. 이성계는 훗날 피의 역사를 부르는 명을 내렸다. 정도전의 도평의사사 기무(機務)직이다. 오늘날의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의 혼합 형태인 기무직은 혁명세력의 정보 총괄 부서였다.


새로운 나라를 개창한 이성계는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정보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장수이었기에 모든 승패는 정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군사정부가 JP에게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게 하여 운용한 것과 흡사하다.

혁명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정보참모본부'의 수장노릇을 이방원이 수행했는데 혁명 성공과 함께 정보장악권이 정도전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방원은 좌절했고 도전은 앙양했다. 이성계를 축으로 한 권력의 무게 중심이 방원에게서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정도전에게 쏠림을 의미한다.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해

@BRI@추동 사저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방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모르지만 아득히 먼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도전의 공은 인정하지만 일등공신은 이방원 자신이라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정보담당을 정도전으로 돌린 것은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거나 토를 달 수도 없었다. 이제까지는 가문의 일이었으나 앞으로는 가문의 영역을 떠나 국가의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란 것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목숨을 결의한 남남으로 혁명대열에 동참했더라면 더 좋은 공신대접을 받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훗날 골육상쟁의 피를 부르는 참극이 벌어진다.

집권자 이성계로서는 아들 방원이 미덥지 않았다. 성숙하지 못한 20대 중반의 나이도 문제려니와 방원이 수집한 정보를 받아 보았을 때 핏줄에 연연한 가공 상태임을 여실히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동안 방원으로부터 정보를 의존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국가를 경영하는데 있어서는 좀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성계는 명을 어기고 정몽주를 격살한 방원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국사를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덕을 베풀며 '새나라'를 이끌어야 할 군주에게 과격한 방원의 성격은 화를 부르는 위험인자로 간주했다. 때문에 아들이지만 멀리하고 싶었다.

결국 이방원의 정몽주 격살은 방원의 단순한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새나라 건국의 마지막 걸림돌 제거작업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성계와 이방원 사이에 골을 깊게 하는 사건이었다.

백성의 마음을 흔들어라

혁명이라는 낱말이 기록된 태조실록
혁명이라는 낱말이 기록된 태조실록이정근
혁명을 다져가는 신세력은 백성들의 환호를 이끌어 낼 정책을 사헌부 상소문 형태로 발표했다. 기강을 확립하고 상벌을 엄격히 할 것이며 환관을 멀리하고 간언을 경청 하라는 등 총 10개항의 정책 중에서 백성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었으니 승니(僧尼) 척결이다.

승니는 본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정신을 수련하면 될 것인데 지금은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고상한 말과 미묘한 이치로써 사류들을 현혹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공갈(恐喝)치기도 한다. 심한 자는 재물을 늘리고 여색(女色)을 탐하니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태조실록>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공개적인 표방이다. 사회악의 표적을 승려들에게 맞춘 것이었다. 물론 고려 말 사찰과 승니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과도한 토지를 소유하고 기층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던 사찰은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었으며 권력자들에게 빌붙어 갖은 사회문제를 야기한 승려들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5·16직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부정부패와 사회악 일소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한 깡패소탕작전과 너무나 흡사하다. 또한 이 상소문에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혁명(革命)이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즉위교서-<태조실록>

정도전이 지은 즉위교서 첫머리다. 당대의 문장가 정도전의 혼이 녹아 있는 명문이다. 고려를 멸하게 된 당위성과 신생국의 좌표를 설정한 명문장이다. 사람의 마음에 복종과 배반함이 있고 천명의 떠나감과 머물러 있음이 있다고 적시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낙향하여 시묘살이 할 때 정몽주가 전해준 <맹자>에서 원용한 것이며 그가 방원에게 전해준 <맹자>에서 인용한 것이다.

혁명세력은 즉위교서를 발표하고 공신도감을 설치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공신록이 작성된다는 소문이 도성에 퍼지자 정도전의 집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공신록에 오르면 당대는 물론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위한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서서 받았다. 용상에 앉으라는 신하들의 간청을 한사코 뿌리쳤다. 군주로서 격식을 파괴하고 신하들에게 친밀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군막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대학연의' 강독에서 체득한 것을 몸소 실천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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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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