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방경찰청은 비전향장기수 김영승씨의 블로그 글에 대해 제 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인천지방경찰청은 '수사보고'에서 "감정인(제 교수)으로부터 회보 받은 감정자료 본 사건의 증거자료로 활용코져 한다"고 밝혔다.안윤학
지난 2004년 공안문제연구소가 폐지됐지만 경찰청이 여전히 '사상검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청은 지난해 발생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2건의 문서 감정을 외부의 민간 연구자에 의뢰한 뒤 이를 재판 증거로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상검증'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민간 연구자에 의뢰한 과정이다. 지난해 서울지방경찰청과 인천지방경찰청이 문서 감정을 의뢰한 국보법 위반 사건은 모두 보수우익단체가 고발한 사건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고발 단체와 시각을 공유하는 뉴라이트 인사에게 문서 감정을 맡겼다. 우익단체가 고발하고 경찰이 수사하면서, 우익에 속하는 뉴라이트 인사가 '국보법 위반'이라고 규정한 자료를 증거로 제출한 셈이다.
지난해 '우익단체 고발→경찰→뉴라이트 인사 감정'의 경로를 거친 공안 사건은 비전향장기수 공동묘역인 '연화공원'의 묘비와 비전향장기수 김영승씨의 블로그 글 사건이다.
경찰은 우익단체 회원이 고발해온 두 사건을 모두 '자유민주연구학회'의 제성호(중앙대 법학) 교수에게 감정 의뢰했다. 제 교수는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한반도포럼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 보수 인사이며, 자유민주연구학회는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시킨 극우단체다. 문서 감정 결과는 당연히 '국보법 위반'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익단체가 북 치고 뉴라이트가 장구 치고
2005년 자유넷·라이트코리아 대표 봉태홍씨 등은 경기 파주 보광사 경내에 비전향장기수 공동묘역(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을 조성한 실천불교승가회(공동의장 효림·성관), 통일광장(비전향장기수 모임) 대표 권낙기씨,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노진민씨 등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자유넷·라이트코리아는 '정통우파'를 자처하는 우익단체다.
봉씨는 "승가회 등은 간첩,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에 '통일애국열사'라는 호칭을 붙여 영웅화하고 묘역을 조성했으며, 이들을 고무·찬양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고발 이유를 밝혔다. 묘비에 새겨진 '애국통일열사, 의사' 등의 호칭과 '민족자주·조국통일의 한길에 평생을 바친 선생님' 등의 문구를 문제 삼은 것.
사건을 맡은 서울지방경찰청은 자유민주연구학회의 제 교수에게 '연화공원 비문 및 표석 내용'에 대해 감정을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제 교수는 A4용지 9장 분량의 이른바 '감정서'를 제출했다. 제 교수는 비문 내용이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노선을 지지, 찬양, 고무, 선동하고 있다"면서 국보법을 위반했다고 결론지었다.
자유민주연구학회는 제 교수가 2005년 10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잡자"는 취지 아래 설립한 학술 단체다. 하지만 학술진흥재단에는 등록돼 있지 않다. 제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학회에는 정통우파와 뉴라이트의 젊은 학자, 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유민주연구학회는 지난해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친북규명위는 정부의 각종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맞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과거 공안 사건들을 우익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민간 차원의 위원회다.
피고발인인 노진민씨는 "극우 인사인 제 교수가 '감정'했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얘기"라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묘역은 찬양·고무 등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언젠가 송환될 시신을 안치할 곳이 없어 종교적·인도적 차원에서 잠시 조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문에서 북한식 용어를 여과 없이 사용했다'는 제 교수의 주장에 대해선 "예전부터 남한 출신 통일운동가 장례식에서도 사용돼온 보편화한 용어"라고 반박했다.
서울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제 교수에게 문건 감정을 의뢰한 바 있다"고 밝혔으나 "검찰·법원으로 넘기는 참고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상 감정서'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이어 "제 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도 타 사건 감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안다"면서도 '연화공원 비석'과 관련해서는 "제 교수의 감정서만 받았다"고 밝혔다. 또 "진보 측 학자의 의견도 들어보려 했으나 의견 제출을 꺼려했다"고 덧붙였다. 감정 비용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감정하려면 국가기관이 정당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