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즐기는 크루즈 여행

피지 야사와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등록 2007.02.23 10:27수정 2007.02.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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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라우토카 항구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라우토카 항구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 김 관 숙

작년 가을입니다. 외국에 사는 아들네 집에 남편과 같이 갔다 온 친구가 서둘러 귀국하느라고 아무 선물도 못 사왔다면서 대신 친구들에게 점심을 샀습니다.

한 달 예정을 하고 가더니 왜 서둘러 귀국했냐고 물었더니 기가 막혀 죽겠다는 표정부터 짓습니다. 아들 집에 가던 날, 아들이 아시아 크루즈를 시켜주겠다고 해서 아들 덕에 난생 처음 호화여행 한 번 하나보다 했는데 한 밤 자고 나더니 말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엄마두 아버지두 영어 못 하잖아, 여러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말야. 이 다음에 우리랑 같이 가지 뭐."

친구들은 입이 얼어붙었습니다. 아들이 괘씸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와이프 사인을 받아낼 자신이 없으면 말이나 꺼내지 말지. 삼 년 만에 만난, 그것도 그만큼 꾸리고 살도록 아버지의 피와 땀인 퇴직금 절반을 뚝 떼어 주는 등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육순 넘은 부모를 이만 저만 섭섭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육순을 훌쩍 넘긴 이들의 건강은 믿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건강에 신경을 쓰고 살아도 기력이 자꾸 떨어져만 가기 때문에 그야말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육신 멀쩡하고 정신 멀쩡하고 여기 저기 아프지 않을 때 여행도 해야 합니다.

"'이 등신아!' 하구 머리에 알밤을 콩 먹이고 싶은 걸 꾹 참고는 그 길로 귀국 비행기를 알아보았다구. 가만, 그니까 일주일 만에 와 버렸다구."
"꾸려 가지고 간, 잔 멸치랑 고춧가루, 김 같은 거는 며느리가 좋아라 했어?"
"것두 괜히 가지구 갔지 뭐야. 며느리 친정에서 부쳐 주고는 해서 떨어지지 않구 먹는다지 뭐야. 기가 막혀, 난 것두 모르구 살았다구!"

그때 친구들은 당장 공동 적금이라도 하나 들어 아시아 크루즈 여행을 가자고 떠들어 댔지만 100~200만원이 드는 여행도 아니고, 또 자식들 도움을 받지 않고 비축금에 연금을 보태어 생활하거나 눈 딱 감고 오십 평대 아파트를 삼십 평대로 줄여서 만든 노후자금으로 알뜰하게 생활을 꾸려가는 처지들이라서 떠들다가 말았습니다.


크루즈 여행은 아직은 대중화가 되지 않은 돈 많이 드는 호화 여행입니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그 낭만이 흐르는 크루즈 여행을 동경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친구의 가슴에 아들의 말이 못이 되었나 봅니다.

a 승선 하기 전에 남편과 딸애가 스노클링 장비를 빌렸습니다

승선 하기 전에 남편과 딸애가 스노클링 장비를 빌렸습니다 ⓒ 김 관 숙


a 라우토카 항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라우토카 항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 김 관 숙

내가 한겨울인 지난 1월 남편과 딸애와 같이 원시적인 비경이 고스란히 살아있기로 유명한 피지 야사와(YASAWA BLUE LAGOON CRUISE) 크루즈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부러우면서도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거긴 위험하잖아, 쿠데타 났잖아."
"그래서 관광객이 푹 줄어서 요즘 일시적으로 값이 많이 내렸데. 그런데다가 딸 덕에 로컬 가격에 가는 거라구."


나는 아시아 크루즈를 못 간 친구의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보통 때처럼 시원스럽게 말했습니다.

"딸 잘 둔 덕에 호사 하네. 아, 부럽다."
"더 늙으면 여행 못 다니지. 비싼 여행이니까 사진 많이 찍어라. 선물도 많이 사오고 말야."

아름다운 라우토카(LAUTOKA)항구에서 꼭대기에 블루라군 크루즈(BLUE LAGOON CRUISE)라고 써 있는 배에 올랐습니다. 호화스럽고, 기항지로 이동 하는 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설들이나 프로그램 같은 것이 갖추어진 큰 배는 아니지만 배에 오르는 순간 무딜대로 무디어진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영화처럼 남태평양 바다를 가르며 유유히 떠 가는 멋진 배 위에 선 내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던 것입니다.

a 배에 올라 항해 코스를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배에 올라 항해 코스를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 김 관 숙


a 방을 배정 받았습니다

방을 배정 받았습니다 ⓒ 김 관 숙


a 크루즈 디렉터 조(JOE)가 일정을 설명합니다.

크루즈 디렉터 조(JOE)가 일정을 설명합니다. ⓒ 김 관 숙

방을 배정 받고 크루즈 디렉터(CRUISE DIRECTOR) 조(JOE)가 정장 차림의 승무원들을 소개하고 항해 일정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갑판에 나가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크루즈 여행이 처음이 아닌 모양입니다. 하긴 그들의 모습에서는 어떤 여유로움이 보입니다. 순수하게 휴식을 겸해 낭만을 즐기려고 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들과 나는 그렇게 달랐습니다.

a 구명자켓을 입고 설명을 듣습니다.

구명자켓을 입고 설명을 듣습니다. ⓒ 김 관 숙


a 식당 입니다

식당 입니다 ⓒ 김 관 숙

열대의 햇살이 여과 없이 꽂히는 갑판 풍경도 처음이고 짙푸른 바다에 그림같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을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푼수떼기처럼 디카를 들고 여기 저기 사방을 막 찍어 댑니다. 하긴 열 장을 찍으면 한두 장 밖에 못 건지는 실력입니다. 그래서 메모리카드를 하나 더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까지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티 타임 시간이 오자 슬슬 나타났습니다. 친구나 연인끼리 온 사람보다 가족끼리 온 사람이 더 많습니다. 머리가 하얗거나 노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습니다.

나는 달랑 커피 한 잔을 가져다가 마시고 앉았는데 그들은 음료와 샌드위치까지 챙겨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느긋하게 창밖에 풍경들을 바라 봅니다. 바라만 볼 뿐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옆 식탁에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자 아들로 보이는 조각같은 얼굴의 건장한 남자가 얼른 할머니에게 "주스 더 가져다가 드릴까요" 하더니 빈 유리컵을 들고 일어나 주스를 한 번 더 따라다가 줍니다. 효자입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눈빛에 배어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크루즈 여행을 온 것입니다.

할머니는 머리만 하얄 뿐이지 정정합니다. 빈 접시들을 치우러 온 승무원에게 첫 기항지가 아직 멀었냐고 빨리 물 속에 들어가고 싶다고 합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바다에서 자야 해요. 스케줄 보니까 저녁에 삼페인 타임이 있어요. 즐거우실 거예요" 그러면서 그 아들은 옆 테이블에 나를 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헬로" 하면서 씩 웃습니다. 나도 웃었습니다. 내 머리도 하얗습니다. 아마도 어머니 같은 친근감이 들었나 봅니다.

그들이 우리 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할머니가 냅킨을 의자에 놓고 일어나자 금발의 며느리가 가만히 그 냅킨을 집어 식탁에 올려 놓았습니다. 영어문화권에 사는 할머니라 식사가 끝났을 땐 냅킨을 식탁에 올려놓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무심히 그랬나 봅니다. 며느리도 착해 보입니다. 길을 잡듯이 아들이 앞을 서고 그 다음에 할머니가, 맨 뒤에는 할머니를 호위하듯이 며느리가 뒤를 따라 갑니다.

문득 그 친구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친구가 아들에게 당한 상황과 방금 식당을 나간 그들의 모습이 비교가 됩니다. 그 친구는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a 사방이 푸르고 흰머리가 안 보여 그런지, 그 할머니때문에 웃음이 터져서 그런지 내 모습이 십년은 젊게 나왔습니다.

사방이 푸르고 흰머리가 안 보여 그런지, 그 할머니때문에 웃음이 터져서 그런지 내 모습이 십년은 젊게 나왔습니다. ⓒ 김 관 숙

갑판에서 망망 대해를 등지고 남편의 디카 앞에서 포즈를 잡는데 누군가가 옆 쪽에서 말했습니다.

"오, 아름다워."
"땡큐!"
"당신 아니고 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그 바람에 웃음이 터지는 내 모습이 디카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아까 그 할머니입니다. 나는 영어가 짧습니다. 내가 아니라 바다입니다. 짧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감 조차도 없습니다. 나는 무안해 죽겠는데 그 할머니는 시침을 떼고 바다를 바라봅니다. 정말 바다가 아름답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뒷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내 나이와 비슷한 그 할머니와 간단한 말을 나누며 다정하게 친구처럼 지낼 생각입니다. 그 할머니가 내게 호감이 아주 없어 보이지도 않지만 인상이 따듯한 것으로 보아 내 짧은 영어를 이해해 줄 것 같습니다.

또 그 친구가 생각이 납니다. 그 친구는 나처럼 영어가 짧은 편이 아닙니다. 딸애가 결혼하면서 두고 갔다는 명화 원본 비디오들을 가끔씩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수준입니다. 그 실력에 전자 사전을 끼고 크루즈 여행을 하면 언어소통에 그리 불편함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벌써부터 여행객들이 한 가족같은 생각이 듭니다. 낭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름답고, 즐거운 크루즈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1월11일 출국해 1개월 간 피지의 수도 수바에 머무는 동안 BUREBASAGA  VILLAGE를 방문했고 YASAWA BLUE LAGOON CRUISE 여행을 했으며 CRUSOE'S RETREAT에서 CORAL REEF가 만들어 내는 하얀 포말 띠를 바라보며 조용한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1월11일 출국해 1개월 간 피지의 수도 수바에 머무는 동안 BUREBASAGA  VILLAGE를 방문했고 YASAWA BLUE LAGOON CRUISE 여행을 했으며 CRUSOE'S RETREAT에서 CORAL REEF가 만들어 내는 하얀 포말 띠를 바라보며 조용한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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