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시니카와 고구려 영류태왕의 선택

[동아시아의 군주들 ⑦] 대 중국 사대 선택한 고구려 제27대 영류태왕

등록 2007.02.25 13:55수정 2007.02.2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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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구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단독 세계패권국가로 떠올랐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팍스 아메리카나'라 할만한 상황의 출현이었다.

이러한 '미국 천하'에 대한 세계 각국의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미국의 세계패권을 철저히 추종하면서 국익을 챙기는 나라들(영국·일본 등)도 있고,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 대항하는 나라의 지도자들(마하티르·차베스 등)도 있다.

@BRI@또 차기 세계패권을 꿈꾸면서도 지금 당장에는 미국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나라들(중국·독일)도 있고, 예전에는 미국에 대항했다가 지금은 일단 몸을 움츠린 나라들(리비아 등)도 있다.

한때는 미국과 협력했다가 대미전략의 변화로 목숨을 잃은 지도자(후세인)가 있는가 하면, 대미전략을 사전에 약간씩 공개하기도 하고 미국을 알쏭달쏭하게 만들기도 하면서 국익을 챙겨 가는 나라(북한)도 있다.

이와 같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하늘 아래에서 세계 각국이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양하다. 어떤 선택이 현명했는지는 이후 판명될 것이고 또 그것은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고구려 영류태왕의 당나라 사대노선

단독 패권국가의 출현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오늘날의 세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7세기 팍스 시니카의 재출현 앞에서 고구려 제27대 영류태왕(榮留太王, 재위 617~642년)도 동일하게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역사드라마 <연개소문>에서도 그러한 영류태왕의 고민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고건무(高建武) 혹은 고건성(高建成)이라는 휘(이름)를 가진 영류태왕은 영양태왕(嬰陽太王)의 이복동생이었다. 통일제국 당나라가 건국(618년)되기 직전인 617년에 그는 고구려 태왕에 즉위하였다.

수나라의 4차례 침공을 격퇴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문화·경제력 등 전반적 국력에서는 중국에 뒤졌는지 모르겠지만 요동과 한반도를 무대로 한 전쟁에서만큼은 고구려는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나라였다.


그런 고구려가 영류태왕 즉위 이후로 당나라에 대한 사대노선으로 급격히 전향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조(條)에 의하면, 영류왕은 재위 25년 동안 당나라에 여덟 번 조공을 했다. 그리고 624년에는 당나라에 역서(曆書) 반급을 청하고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우리가 서기(西紀)를 받아들임으로써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를 인정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역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또 이것은 중원 세계와 요동 세계가 병존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요동 패권국가가 중원 패권국가를 인정하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요동 세계를 중원 세계에 편입시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류태왕의 사대 '행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영류태왕은 628년에는 당나라에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바치더니, 631년에는 당나라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가 고구려의 경관(京觀)을 헐어버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경관은 고구려의 대(對)수나라 전승을 기념하는 조형물이었다.

위와 같이, 영류태왕은 대제국 고구려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사대주의적 대외정책으로 일관하였다. TV 드라마에서는 그가 당나라에 대해 사대를 취한 이유와 관련하여 '백성의 안위를 위하는 군주의 마음'으로 풀이하고 있다. 동시에, 그러한 사대노선을 굴욕적인 것으로 비난하는 고구려 내부의 강경노선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영류태왕의 선택을 '백성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나 '굴욕적인 사대노선'의 차원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7세기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2가지는 영류태왕의 선택에 대한 가치평가의 차원일 뿐,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사실분석의 차원은 분명 아니다. 그럼, 영류태왕은 어떤 상황 하에서 그런 선택을 내렸을까?

현상유지를 위한 '전쟁'과 '화친' 패러다임 대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7세기가 갖는 특징을 들라면, 3세기 이후 계속된 중국의 오랜 분열(삼국시대-5호 16국 시대-남북조시대)이 해소되고 중국의 통일이 성취된 시기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수나라도 통일제국이었지만 수나라는 얼마 못 가서 멸망했기 때문에, 중국의 분열을 극복한 진정한 의미의 통일제국은 당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통일은 고구려의 행보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가 5세기 이후 요동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중국이 하나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서토(西土) 진출은 사실상 실현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남쪽의 신라가 급성장하고 또 김유신이라는 특출한 장군이 출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서토 진출을 도모하기보다는 고구려의 현상을 유지하는 일이 더 급선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의 국가적 목표는 '현상유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 '현상유지'를 위한 방법론과 관련하여 7세기 초반의 고구려에는 2가지 목소리가 있었다. 한 가지는 종래대로 중국에 군사적으로 맞서자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중국과 화친을 맺자는 것이었다.

이른 바 '전쟁'과 '화친'의 패러다임 대결이었던 것이다. 전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연개소문이었다면, 후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영류태왕이었다.

당시로서는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수나라라는 통일제국에 대해 연전연승을 거둔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나라를 디디고 일어선 당나라의 전력을 자세히 몰랐기 때문에, 신생 당나라의 출현 앞에서 고구려인들이 고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선택된 카드를 갖고 국가를 얼마나 잘 지켜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어떤 카드를 선택했는가를 놓고 가치평가를 할 게 아니라, 선택된 카드를 얼마나 잘 지켰는가를 놓고 그런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1-0으로 리드하고 있는 9회말 2아웃 만루상황에서 상대팀의 홈런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면, 이때 감독에게는 2가지 선택 가능한 카드가 있을 것이다. 홈런타자에게 사구를 허용하고 다음 타자를 잡은 뒤에 연장전에서 승부를 걸 것이냐, 아니면 특급 마무리투수를 투입하여 홈런타자를 잡고 경기를 여기서 끝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감독이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그 순간에는 그 선택이 최선일 것이다. 문제는 감독과 선수들이 작전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618년의 영류태왕도 바로 그러했다. 중국이 통일되고 신라가 치고 올라오는 상황 속에서 그는 고구려의 현상유지를 위해 전쟁이냐 화친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화친을 선택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국가끼리 화친을 맺으면 어느 한쪽이 상대편의 '아랫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한쪽이 신하가 되면 다른 한쪽은 군주가 되고 한쪽이 형이 되면 다른 한쪽은 동생이 되는 관계가 국가 간에도 존재했다. 대등한 관계라는 것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전혀 몰랐던 관념'이었다.

당시의 고구려 영류태왕은 당나라를 '윗사람'으로 받아들이면서 '화친'을 얻게 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고구려가 당나라의 아랫사람이 되었다는 게 아니라 일단 화친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존심 꺾는 지나친 사대로 반정 초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잘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평가는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느냐를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그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영류태왕이 당나라와의 화친을 선택한 이후에 그 카드를 잘 지키면서 고구려의 현상을 유지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영류태왕의 사대는 도를 지나치게 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당나라에 고구려의 봉역도를 바치는 것도 모자라서, 당나라가 고구려 경내에 들어와 고구려의 전승 기념물을 파괴하는 것까지 묵인하였다. 이것은 미군이 평양 시내에서 '주체탑'을 훼손하는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900년 가까운 대제국이 이제 갓 세워진 신생국에게 철저하게 수모를 당하였던 것이다.

영류태왕이 형식적인 조공과 책봉을 교환하는 선에서 머물렀다면 고구려 내부의 반발도 그리 심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사대는 연개소문의 반정(反正)을 초래할 만큼 고구려인들의 자존심을 심히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에서 모자라, 그의 사대는 당나라의 패권을 고구려 곳곳에 이식하는 결과까지 가져왔다.

그 한 예로, 641년에는 당나라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이 고구려의 지방을 순회하면서 지방 수령들에게 선물공세를 펴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영류태왕이 얼마나 '마음 좋은 사람'이었는가를 잘 보여 주는 사례일 것이다.

또 영류태왕의 사대로 인해 당나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고구려가 숨죽이고 있는 사이에 당나라는 서쪽의 돌궐 등을 제압하고 중국 주변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안정시킨 당나라에게 남은 것은 고구려를 확실히 제압하는 것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영류태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는 것이다.

결국 영류태왕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642년 10월에 연개소문의 반정이 성공을 거두고, 그 연개소문에 대해 고구려인들이 지지를 보냈다는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다.

'영류'(榮留)라는 표현처럼 그는 고구려가 요동과 한반도에서 '영화롭게(榮) 머무르기(留)'를 꿈꾸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카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결국에는 신하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전쟁과 화친이라는 두 패러다임의 대결에서 전쟁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 지도자들도 팍스 아메리카나 아래에서 갖가지 선택 카드를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익을 챙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미국에 맞서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미국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떤 카드를 선택하든 간에 그것이 최적(最適)의 고려 하에서 내려진 것이라면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카드를 선택하든 간에 국가로서의 '최소한'을 유지하지 않으면 그 카드를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고구려 영류태왕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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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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