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선화동으로 이전한 충남도청 전경(1932) 최장문
부동산 열풍은 그때도 대단했다. 개발정보에 밝은 사람들은 도청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토지 투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가령 공주 갑부 김갑순은 일찍부터 대전역 부근과 대전 시가지 땅을 사들여 도청이전 부지를 기부채납하고도 막대한 개발 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
공주지역에서 도청이전 반대운동이 본격화 된 것은 1930년 11월, 총독부가 정식으로 ‘충남도청 신축 예산안’을 편성하면서부터였다. 도청을 사수하려는 공주와 도청을 끌어오려는 대전, 천안, 조치원, 논산 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시작된다. “어여쁜 기생첩 하나를 두고 다섯 사내가 다투는 꼴”이라는 당시의 신문 논평은 그 때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주유지들은 ‘대전은 일본인 신흥도시, 공주는 백제왕도·조선감영 소재지와 같은 전통있는 조선 도시’라는 명분으로, 대전유지들은 ‘대전은 교통이 편리하고 발전 가능성이 큰 신흥도시, 공주는 몰락하는 황성옛터’라는 구호로 흠집내기 전략을 구사한다.
천안과 조치원도 물고물리는 도청유치 전에 가세한다. 천안은 ‘교통의 요지이자 충남서부 9개군(장항선이 통과하는 군)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동안, 조치원은 ‘충남·북을 합하여 그 중심지인 조치원에 도청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It's Daejeon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람이 삶이 되고, 삶이 세월속에서 문신이 되고 꽃이 되어, 저만치에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했는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