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닫힌 시간의 문을 열다

[HDTV문학관]<난쏘공>과 <랍스터~> 속에서 살아난 시간

등록 2007.03.06 10:15수정 2007.03.06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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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바보상자인 까닭은 무엇보다 일방의 강제를 전제한 폭력적 구조 때문이다. TV 혹은 방송에는 인간의 사유(思惟)라는 것이 애초부터 거세되어 있다. 일방의 정보전달과 그것의 수용이라는 기계적 사고로 인간을 길들이는 것이 TV라는 말이다. 우리가 TV를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가 제 맘대로 우리의 정신을 파고든다.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을 매체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아는 것이 많아지는 만큼 갈수록 멍청해진다. 왜? 생각하지 않고 습득할 뿐이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의 미디어는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사고까지 조작해버린다. 아니라고? 우리의 사유로부터 결론에 이르기도 전에 우리는 미디어가 떠들어대고 왱왱거린 소리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며 산다. 신화에서 몰락으로, 황우석이 있기 전에 미디어가 있었다.

그런 미디어의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의 입장에서, 모처럼 사유라는 것을 또는 진지한 질문과 궁리를 하도록 만드는 영상문학 세 편을 볼 수 있었던 지난 주말(3월3일)은 행복하였다.

KBS의 < HDTV문학관2007 >을 통해 삼일 연속 방영된 '카스테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랍스터를 먹는 시간'이 그것이다. 그 중 '난소공'과 '랍스터~'는 산업화와 개발의 시대였던 70년대의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TV, 닫힌 시간을 열다

근래의 작가군에 속하는 박민규의 작품집 <카스테라>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금요일(2일) 방영분은 무덤덤하게 보았다. 시대적 경험의 층위가 다른 까닭이기도 하겠으나 무엇보다 내가 그의 소설을 대충 읽은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두 편의 영상에서는 시간의 창고 속에 가두어졌던 기억과 경험들이 닫힌 시간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기자에게로 걸어 나왔다.

그 시간은 과거 속에서 스러진 지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현재에 살아 꿈틀대는 산시간이었다. 시간은 늘 과거로부터 와서 현재에 이르고 미래를 향해 뒷모습을 보인다. 역사는 그래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대화로 살아난다. 사라진 것은 유한한 기억이거나 애써 잊고자하는 인간의 비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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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이 방영되기 얼마 전에는 갚기도 힘든 빚을 진 채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도망자(불법체류자)의 신분도 달게 감수했던 우리의 동포들이 우리 같은 철창에서 불타 죽었다. 차마 인권을 말할 수도 없이, '가지지 못한' 이유만으로 당한 그 억울한 죽음은 개의 죽음만도 못하였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지난 시간의 현재형인가.

<랍스터~>의 건석이 정글의 살육을 저지른 따이한 용병의 광기와 대면하던 시간에는 베트남전 이후 처음으로 외국에서 전사한 한국 군인의 싸늘한 시신이 유족의 오열 속에 이 땅을 밟고 있었다. 스스로 걸어 돌아오지 못하고 전우의 손에 들려 돌아온 그 주검이 슬펐던지 하늘은 비로 울었고 땅은 바람으로 통곡하였다. 무서운 시간의 현재적 발현에 소름이 돋는다.


두 소설은 산업화와 개발의 미명 하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조차 쫓겨나고 급격히 몰락해갔던 '가지지 못한 자들'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살았던 70년대의 한복판에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 가진 자의 기만과 억압, 독재권력의 총구에 왜소해진 난장이들이 우글대었다. 비 새는 천막조차 가지지 못한 난장이들은 내몰리고, 내몰리다 굴뚝에서 떨어져 죽어야 했고 달러 몇 푼을 목숨값 삼아 머나먼 이국땅에서 우리의 삶과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을 향해 총질을 해대며 미쳐갔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들은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난쏘공)

70년대의 사회구조적 모순이 지금에는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부익부 빈익빈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일그러진 사회상은 여전하다. 다만 난장이들의 키가 조금 더 자랐을 뿐이다. 제국의 기름진 패스트푸드 덕분에. 권력이 던져준 식은 밥 한 덩이 덕분으로... 길거리에 천국을 노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삶은 지옥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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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따이한들도 불쌍했지 않은가. 독립성이 있고 부자인 나라라면 미국이 쥐어준 총을 들고 이 먼나라까지 왜 왔겠나. 우리도 불쌍했지만 따이한들은 우리보다 더 불쌍했던 셈이지. 우리야 제 땅을 지키고 살려니까 어쩔 수 없이 죽고 싸우고 했지만 아무 관계도 없는 남의 나라에 와서 죽고 다친 따이한들은 뭔가."(랍스터~)

자신들의 땅이 외국군대의 군홧발에 유린되는 것을 용납지 않은 해방의 전사들은 그래서 '따이한'이란 말도 쓰지 않았단다. '박정희의 군대'라고 하였다지. 이라크 사람들도 '노무현의 군대'라고 불러줄까. 용병의 목숨값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 덕분에 우리 돈으로 이라크에 간 군대는 그만큼 떳떳할까. 열린 시간의 문으로 가슴 답답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시간의 어느 부분도 잘라낼 수 없다

소설은 인물과 사건을 통해 당대를 증거한다. 어느 이론서보다 쉽게, 어느 선배와의 학습보다 친절하게 환히 빛나는 세상의 모퉁이에 짙은 그늘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빛나는 제국)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푸른 창공이 아니라 컴컴한 땅 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거기에 사는 거의 모두가 난장이란 슬픈 현실은 잊혀지지 않는다.

<빛나는 제국> 르네 마그리트 작
<빛나는 제국> 르네 마그리트 작도서출판 돌베게
2007년을 힘차게 열어젖힌 TV문학관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시간의 계속성이다. 그것은 지난 과거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않고는 현재의 올바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각성과 성찰의 진지한 수행으로만 현재의 시간을, 우리의 세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분 단위로 쪼개놓은 근대의 시간은 시간의 분절이 아니라 영악한 인간의 편의적 구분에 불과하다.

난장이네 가족의 싸움은 패배한다(구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 까만 쇠공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간(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은) 난장이의 자식들이나 남의 명령에 이끌려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벌인 박정희의 군대나 패배하기는 마찬가지다. <난쏘공>의 카메라가 잡은 영희 아버지의 발에 매달린 까만 쇠공은 이미 추락을 예감시킨다. <랍스터~>의 보 반 러이의 살 속에 박힌 파편들은, 비록 혁명의 훈장일지라도 일그러지고 파괴된 개인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인간의 흉터이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까닭은,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인간 모두가 놓여 있는 숙명의 비정함이며 시간의 냉정함이다. 죽도록 아픈 기억과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는 오늘 이 시간을 견딜 수 없고 내일로 예정된 삶의 분량을 채울 수 없다. 한 때 힘들고 고단했던 시간을 그리워할 수 있는 여유와 추억은, 한편 비정한 신의 장난이다.

"우린 왜 랍스터처럼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잘라내 버릴 수가 없을까?"(랍스터~)

우리가 '생애의 어느 부분도 잘라낼 수 없'듯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시간의 어느 부분만을 잘라낼 수 없다. 누구도 종교에서 기적만을 가질 수 없듯이, 우리의 시간 속에서 행복한 기억만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TV는 다시 소음으로 왱왱거릴 것이다.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고….

덧붙이는 글 | TV리뷰 시민기자단 응모
ncn뉴스에도 송고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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