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서울역사박물관의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전시회장에 출품된 사진자료이다. 고종과 순종 사이의 어깨너머로 영친왕의 다른 사진을 오려붙인 흔적은 육안으로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은 서울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관에도 진열되어 있다.서울역사박물관
첫째, 이 사진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조작'되었다. 이 사진이 합성이네 마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의 기술적인 합성능력이 게재되어 진위여부를 가려내기가 어려울 때나 사용되는 말이고, 이 사진의 경우는 전혀 그러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번에 서울역사박물관에 진열 전시되어 있는 문제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원래의 사진에다 영친왕의 다른 사진을 따로 오려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건 사진학 전공자들을 동원할 것까지도 없고, 두 눈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연히 가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2004년도에 각 신문지상을 통해 소개된 사진은 인화상태가 조악하고 배경부분도 너무 어두운 것이어서 별개의 사진을 오려붙인 흔적을 판별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번에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에 출품된 해당 사진은 인화상태가 매우 선명하여 가까이서 쳐다보면, 다른 사진을 오려붙인 것이란 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떠한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인위적으로 오려붙인 게 명백하다. 이로써 멀쩡했던 원래 사진까지 그 가치를 현저하게 훼손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가 이런 짓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자료의 조작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덕혜옹주 나이를 거꾸로 먹어?
이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는 두 번째 논점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이다.
먼저, 위의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 촬영된 지가 분명하지 않다. 처음 사진이 세상에 소개될 때에 "1915년경 영왕의 일시귀국을 기념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 정도가 주어졌을 뿐이다. 물론 잘못된 설명이다. 사진제공자라고 해서 그런 부분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잘못 추정하였다고 그 부분까지 책임을 추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몇 가지 기초적인 사실관계들을 검증해보면, 이 사진은 "역사적으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난다.
이 부분을 하나씩 설명하면, 이러하다.
사진 속에 고종황제(1852-1919)의 모습이 보이므로, 이건 1919년 이전에 촬영된 게 확실하다. 그리고 영친왕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그가 국내에 되돌아왔을 때에 촬영된 기념사진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울러 고종이 일본으로 건너간 적은 결코 없었으므로, 이건 결단코 국내에서 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가 세상을 뜰 때까지 영친왕은 몇 번이나, 그리고 언제 조선으로 되돌아왔던 것인가?
대한제국 시절 황태자였던 영친왕은 일본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이토통감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이때가 1907년 12월 5일이다. 그 이후 그는 부왕인 고종황제와 딱 세 차례 상면할 기회를 가졌다. 아래는 이른바 이왕세자의 귀선(歸鮮, 그 당시는 조선에 돌아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에 관한 연혁이다. (다만, 날짜는 서울체류일자를 기준으로 정리하였다.)
제1차 귀선, 1911.7.23~8.5,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장례(1911.7.20일 엄비 훙서, 8.2일 장의 거행)
제2차 귀선, 1918.1.13~1.26,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소위 임관 후 귀국
제3차 귀선, 1918.8.28~9.2, 고종 환후 위문차 귀국(이후 1919.1.22일 고종 훙거로 1919.1.24일에 급거 귀국)
이렇게 보면, 영친왕이 등장하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 이전에 촬영된 것일 수는 결코 없다. 더구나 같은 사진 속에는 덕혜옹주의 모습까지 보인다. 덕혜옹주의 출생일자는 1912년 5월 25일이다. 여동생 덕혜옹주와 오빠인 영친왕의 첫 대면은 당연히 1918년 1월에야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 사진이 엉터리라는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다. 바로 아래에 나오는 별개의 사진자료(<매일신보> 1918년 1월 22일자 수록)가 그것이다. 이 자료 역시 황실관련사진으로서는 제법 많이 알려진 것으로, 이번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회에도 출품되어 위의 조작사진과 나란히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