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사고였을까, 살인이었을까

[서평] 니시카와 미와의 <유레루>

등록 2007.03.08 13:33수정 2007.03.0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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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재산다툼을 하거나 소송을 걸게 되면 사람들은 일단 혀를 찬다. 쯧쯧, 어떻게 형제지간에 저런 일을…. 한 여성을 두고 형제가 동시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엔 더하다. 어떻게 형의 여자를. 어떻게 동생의 여자를.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듯 치를 떤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한번도 꺼내 보인 적이 없었던 형제에 대한 어두운 감정이 음침하게 쌓여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가끔 명절 같은 때 만나면 나도 모르게 형에게 던지곤 하던 악의적인 말들, 비틀린 농담들. 그것의 끝까지 따라가 보면 어느 정도 분량의 어두움이 잠재성을 띄고 소용돌이치고 있을지 누군들 측정할 수 있을까.

형제란(혹은 자매, 남매) 생이 시작되는 첫 순간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세상에 부모의 사랑을 나누어 가져야 하는 존재는 형제밖에 없다.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질투심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해서 부모의 사랑을 저울질하며 조바심 내는 성장기,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형제는 부모의 사랑을 쪼개 가져야 하는 필생의 라이벌이다.

많은 열등감과 성격적 결함이 태초에 이러한 형제 관계에서 출발한다. 물론 형제에게 이렇게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제는 운명적으로 평생 친구이며 늙어가는 부모님의 인생을 함께 끌어안는 역할을 나누게 된다. 결국 형제란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 동시에 가장 먼 사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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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랜덤하우스

<유레루>는 그런 형제에 관한 음울한 소설이다. 한 여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주위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가 차례차례 펼쳐지는 이 고백체의 소설은 길고 환상적인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노루씨는 모두들 생각하는 것처럼 정직하지 않습니다. 둔한 척하는 재주가 거의 천재적으로 교묘합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 감정을 꾹 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면 그 감정 위에 드러내는 어떤 행동도 오로지 비뚤어지기만 하고 으스스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어머니와의 생활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떨어져 죽게 되는 가와바타 치에코의 고백이다. 그녀는 '한없이 착하다'고 칭송받는 미노루(형)의 본심을 어느 순간부터 읽게 되고 그것을 읽어버린 후부터는 미노루의 행동 하나하나가 두렵다. 외지고 조용한 곳에 위치한 주유소. 그 주유소에서 거의 평생을 보내는 한 가족이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생채기를 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끔찍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이다.

내 안에도 같은 요소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끔찍하고, 그런 본심을 꾹꾹 누르며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이 용케 일상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이를테면 세상 모든 이들이 신이 내린 희한한 벌칙을 알면서도 모르는척하고 꿀꺽꿀꺽 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희열이랄까. 일종의 슬픈 동지애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용모와 용기로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온 동생 다케루, 그리고 그런 동생을 보면서 평생을 '착하게' 살아온 형. 어느 날 한 여자가 죽음으로써 그들의 본성을 둘러싸고 있던 보호막이 벗겨져나가고 동생은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형의 인생을 되찾아 주겠어. 형에게 진짜 모습을 되돌려 주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형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일이었을까? 결국 다케루가 내린 결정도 형의 입장에서 보면 독선과 오만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아무것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 결정을 형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후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절연했는지, 혹은 그제야 서로를 끌어안고 형제애를 나누며 아름답게 오래오래 살아갔는지. 심지어 치에코의 죽음이 사고사였는지 타살이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책장을 넘길수록 모든 사실은 흔들리고 그에 따라 독자의 마음도 점차 흔들린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무의식이 있는가. 우리가 밖으로 내보이는 몸짓과 말과 행위는 실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그렇다고 우리 안에 들어있는 진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불러올까. 그 답을 우리는 모른다. 아마 작가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작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깊은 내면에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커다란 우주 하나가 자리 잡아, 생의 어느 순간 툭툭 튀어나와 인생 전체를 흔들어 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쓰게 되었을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 그 영원한 의문에 대하여.

유레루

니시카와 미와 지음, 오근영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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