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아니 우린 비혼세상을 꿈꾼다

비혼들의 발랄한 반란, 비혼여성 축제

등록 2007.03.09 08:45수정 2007.07.0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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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11일 밤 9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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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주선

"우리는 비혼 여성입니다. 결혼하지 못한 미혼여성이 아닌,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선택한 비혼 여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의 축복과 함께, 비혼으로 홀로 또 함께 잘 살겠노라고 신성하게 선언합니다."

3·8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주의 모임 언니네트워크에서는 낯선 행사를 준비 중이다. 최초의 '비혼식'이 그것이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로 정절과 순결을 맹세하는 결혼식과 달리 짙은 자주색의 비혼예복이 준비되어 있다. 비장한 '비혼 선언문', 비혼들의 자유발언대도 마련된다.

'비혼 여성 축제-비혼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10일 오후 3시부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다.

결혼식만 있나? 비혼식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대부분 여성의 인생은 결혼과 함께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어린애 취급을 받게 마련이다.

'비혼 꽃이 피었습니다'를 준비하는 기획단의 밈(별칭·24)이 말한다.

"비혼식의 주제색으로 짙은 자주색을 선택한 데에는 이미 스스로 완성되고 성숙된 존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언니네트워크의 운영위원이자 역시 기획단에서 활동 중인 나비야(별칭·24)도 덧붙인다.

"짙은 자주색은 정열, 적극성, 도발, 그리고 자유로운 인상을 주지요."

그런데 왜 하필 '꽃'일까.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서는 노처녀라거나 팔릴 시기가 지났다거나 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팽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꽃필 수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이지요."

똑부러진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행사 당일 참가자에게는 화려한 코사지를 달아줄 예정이다.

비혼식을 올릴 참가자 10명이 예복을 입고 비혼 선언문을 낭독하면 주례사, 기념촬영, 피로연 등의 예식이 엄숙히 진행된다.

나이 지긋하고 권위 있는 어른을 모셔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신랑을 섬기라"는 주례사는? 물론 없다. 행사 당일에 참가한 비혼 여성 하객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건네 "잘 살아라"는 덕담을 듣는 시간이 비혼식의 주례사다.

비혼이라면 혼자 조용히 살지 뭘 떠들썩하게 사람들 불러다 잔치까지 하느냐고?

비혼식은 왜 비혼을 결심했으며, 어떻게 비혼으로 잘 살 건지 만인 앞에서 구체적으로 다짐하는 시간이다. 안그래도 가족과 직장이 '결혼' 위주로 경조사를 챙기고 휴가와 상여금을 지급해 억울한데 '결혼 제도'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축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현실은 냉혹... 곳곳에 존재하는 '비혼'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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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주선

스물 일곱 살 그림(별칭)은 특히 결혼 제도의 배타성이 싫어 비혼을 택했다. 가족 내 암묵적인 종교 통일의 규칙이나 명절에는 가족이 꼭 모여야 한다는 애착이 때론 너무 지나쳐서 목을 죄는 경우가 있다. '정상 가족'이라는 틀은 한부모 가정이나 레즈비언 커플을 배제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그림은 결혼 대신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밝힌 잘해보지(가명·24)도 "미혼이 아니라 비혼이라고 말해야 한다"며 "결혼은 선택사항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가는 끊임없이 여성을 타자화 하고 여성의 삶과 몸에 개입한다"며 '여성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통제하고 재생산의 권리를 국가에 대해 요구하기 위해 비혼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비혼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순간, 곳곳에 있는 제도적 벽에 맞닥뜨린다.

보험이나 연금의 수급자를 선택하는데 보통 배우자를 수급자로 선택하게 되어있어 배우자가 아닌 반려자나 성소수자 커플일 경우에는 파트너를 수급자로 지정할 수 없다. 전세금 대출 제도 역시 비혼 여성에게 가혹하다.

직장 내에선 또 어떤가. 가족과 다름없는 공동체를 꾸리고 있음에도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는 '닫힌 결혼 문화'가 비혼 여성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기획단의 참가자이자, 최근까지 한 시민단체에서 근무했던 난새(별칭·32)는 "임금 체불 시에 가장 위주로 임금이 지급되면 비혼 여성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경·조사도 가족관계 중심으로 챙기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난새는 전 직장에서 "그렇다면 내가 비혼식 올리면 똑같이 참석해서 축하해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가 "그러다가 나중에 결혼하면 어쩔건데?"하는 대답을 들었다. 난새는 "비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결혼의 미완성 상태로 본다는 증거 아니냐"고 덧붙였다.

비혼세상을 꿈꾼다... 비혼여성 위한 라디오 방송도

비혼 여성으로 살기 고달픈 현실, 그래도 이들은 꿈을 꾼다. 난새는 '비혼 여성 마을'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꼭 같은 집이 아니더라도 동네에서 '전화하면 달려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친구들과 모여 사는 일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마을이 형성될 거고 그렇게 되면 생협을 만들어 서로가 가진 자원을 나누며 살고 싶단다.

"생협을 통해서 아이나 반려동물을 맡아줄 수도 있고요. 행정관청이나 정부에 비혼여성 요구안을 공동으로 제출해 제도 개선을 모색할 수도 있겠지요."

언니네트워크에선 이미 비혼 여성들이 소모임 '비혼살롱'을 만들어 온·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있다. 지난 해 추석과 올해 설에도 같이 음식을 해먹으며 명절을 보냈다.

비혼 여성주의자들의 라디오 방송 '야성의 꽃다방'(FM 100.7㎒, 서울 마포지역)도 있다. 부모로부터 감정적·경제적으로 독립하기, 비혼 여성으로 살아남는 법, 직장 내 성희롱 대처법 등의 생활 정보를 나누고 알려 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비혼 #여성 #비혼식 #여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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