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상추 봉달이 안 좀 잘 보거라이!"

상추봉지에 며느리 용돈 넣어주신 시어머니

등록 2007.03.09 19:04수정 2007.03.0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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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은 전국의 많은 대학이 입학식을 하는 날이었다.


나도 올해에 대학 입학하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은 공부에 취미가 없어 선택한 것이 사진학이고, 좋다는 대학에 들어갈 실력은 안되어 국립대학으로 유일하게 사진학과가 있는 순천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BRI@그래도 기죽지 않고 넉살 좋은 아들 녀석은 "아빠 등록금 부담 덜어드리려고 서울의 전문대학을 포기하고 아빠 고향의 국립대학에 입학했다"고 넉살이다. 더 가관인 것은 학교 근처에 있는 할아버지 집도 마다하고 방을 얻어내라고 하는 이유는 "늦게 집에 들어가면 할아버지 걱정하시기 때문에 방을 얻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암튼 이런저런 이유로일 방을 얻어 아들 녀석의 살림을 차려주고 아내와 함께 고향집의 부모님을 찾아 뵈었다.

설에 찾아 뵈었을 때 "(부모님께서) 바람을 쐬고 싶어하신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묵살하였으나, 이번에는 꼭 바람을 쐐드려야 한다는 아내의 충고가 생각나 물어보았다.

"어디 가보시고 싶은 곳이 있으세요?" 했더니, 대뜸 "화양면 백야도가 다리가 놓였다는디? 돌산도도 한 바퀴 돌아보고 싶고…" 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시다가, "바쁜데 놔둬라" 하신다.


여수반도 끝의 가막만 서측은 백야도, 동측은 돌산도가 위치하고 있다.
여수반도 끝의 가막만 서측은 백야도, 동측은 돌산도가 위치하고 있다.양동정
"시간 있으니 가십시다" 하고는 부모님과 동네에서 어머니와 가장 친하신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지도를 보고 백야도를 찾아 떠났다.

863지방도와 22번 지방도를 따라 도착한 백야도는 여수반도 끝의 가막만 서쪽에 있다. 17번 국도 최남단에 있는 돌산도는 가막만 동쪽에 있으며, 두 섬이 모두 연육교로 연결되어 육지나 다름이 없다.


어두운 밤 뱃길을 밝혀준 백야도 등대
어두운 밤 뱃길을 밝혀준 백야도 등대양동정
최근 연육교가 개통된 백야도는 육지와의 거리가 약 100여 미터밖에 안 되는 듯하나, 이제야 다리가 놓였다는 것을 보며 역시 개발이 늦었구나 싶다. 백야도 등대 부근에서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신 아버님은 며느리(둘째)에게 "아가! 미국 간 큰 며누리 오면 꼭 데리고 와서 구경시켜줘라 이잉"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큰며느리 생각이 나시나 보다.

우리가 잘 살도록 고생하시다 이제는 걷는 일 마져도 불편하신 세분 농인들..
우리가 잘 살도록 고생하시다 이제는 걷는 일 마져도 불편하신 세분 농인들..양동정
돌산도에 들어서는 돌산대교의 웅자함과 아름다움을 보신 아버님이 "10여 년 전에 와 보고 처음이다" 하시며, "많이 변했다"를 연발 하신다. 향일암 아래에 도착해서는 "전에 왔을 때는 암자까지 올라갔는데…" 하시며 다리가 아파서 올라가지 못하심을 한탄하시며 또 며느리에게 당부하신다.

"아가! 걸을 수 있을 때 어디든지 가봐야 한다."

향일암 가는 길아래의 선홍빛 동백이 푸른 바다와 잘 어울린다.
향일암 가는 길아래의 선홍빛 동백이 푸른 바다와 잘 어울린다.양동정
오랜만에 가보고 싶으신 곳을 둘러보신 부모님과 함께 매운탕 집에 들렀다. 신선한 생선 매운탕에, 시장기까지 더하신 듯 맛있게 점심을 하신다. 반나절 정도의 나들이를 마치고 고향집에 들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 쌀가마니와 무 구덩이에서 꺼낸 무며, 나물거리, 비닐하우스 안의 상치, 갓김치, 된장 등 바리바리 실어 주신다.

동구 박까지 나오셔서 조심해서 가라고 하시며 손을 흔들어 주시는 그렇게 강인하시던 두 분이 너무나 연로해 보인다. 6남매를 키워 다 서울로 내보내시고 두 노인만 외롭게 선산을 지키며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시는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까워 보인다.

서울에 도착하여 "차 밀리지 않고 잘 도착했습니다"하고 전화를 드린 아내에게 어머니께서 "아가! 상추 봉달이 안에 좀 잘봐라!" 하신단다. "어머니 뭘 잘봐요?" 하고 여쭈니 "그냥! 잘 봐라" 하신단다.

고향집 마당의 비닐하우스에서 뜯어와 싸주신 상추봉지를 펼쳐보니 꼬깃꼬깃한 돈 5만원이 들어 있다. 설에 용돈 드렸다고 이번에는 "용돈도 못 드리고 왔는데…" 하며, "참! 어머님도!" 하는 아내가 오늘따라 "나에게는 최고의 반려자다" 싶다.

아마도 며느리가 용돈을 주시면 안 받을 것 같으니 살짝이 상추봉지에 넣어 두시고 서울에 도착한 후에 알려주시는 이 마음이 정녕 모든 부모님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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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역할에 공감하는 바 있어 오랜 공직 생활 동안의 경험으로 고착화 된 생각에서 탈피한 시민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려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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