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읍지를 반대하는 수구세력

[태종 이방원53]정통유학과 도참설의 한판 대결 2

등록 2007.03.10 11:41수정 2007.03.1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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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이전과 같은 대 역사(役事)는 수백 년을 내다보는 국가적인 장래를 생각해야 하는데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집과 대문 앞에 문전옥답만을 생각했다.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후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서운관원(書雲觀員) 유한우와 이양달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신이 배운 바로 보아서는 무악은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
"나라의 큰 일이 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좋지 않다' '좋다' 하니 지난번에 현지를 답사한 재상과 서운관 관원이 그 옳고 그른 것을 논의해서 보고하라."


임금이 한발 물러섰다. 하륜이 추천한 무악이 물 건너 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권중화와 우시중 김사형이 무악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개경을 탈출하고 싶은 태조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계룡산 천도공사가 중지된 상태에서 후보지가 결정되지 않고 표류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마음이 바빠졌다.

"다시 좋은 곳을 물색하여 보고하라."

서운관 관원들에 의하여 불일사(佛日寺) 터가 등장하고 선고개(鐥岾)가 도당에 추천되었다. 선고개를 답사한 남은이 화를 벌컥 냈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자들인가?"

서운관 관원 이양달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계룡산 토목공사가 중지된 것도 6개월이 지났다.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의 갑론을박이 짜증스러웠다.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하륜이 지목한 무악에 미련이 많았다. 한고조가 진나라의 흥덕궁을 고쳐 지은 장락궁을 그대로 본떠 평양에 지은 장락궁보다 더 큰 궁전이 들어설 자리라 하니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왕은 몸소 무악산을 답사하겠다고 나섰다.

무악산 현지 답사에 나선 태조 이성계


@BRI@임진강을 건넌 임금 일행이 무악에 도착했다. 때는 폭염이 내리쬐는 8월이었다. 임금이 당일에 환궁하지 못하는 원행은 신하들에게 어려운 수행이었다. 훗날 조선 왕조가 정착된 이후에는 행궁을 지어 왕이 유숙할 수 있었지만 건국초기에는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왕도 노숙했다. 허허벌판 야전에서 단련된 태조 이성계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대청 사랑방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아왔던 사대부들은 곤혹스러웠다.

파주 고양과 연결된 구릉에서 바라보니 한강이 시야에 들어왔다. 삼남에서 거두어들인 세곡과 당화(唐貨)를 가득 실은 무역선이 드나들기에 아주 좋아보였다. 당화란 당나라시대 이후 중국의 고급상품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수출입 상품을 의미한다. 태조 이성계는 흡족한 웃음을 만면에 지었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발굴한 하륜이 한결 미더웠다.

개경도 명나라 화물이 드나들었다. 산동 반도에서 출발한 선박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와 벽란도에서 짐을 부리고 고려의 특산물을 싣고 상해로 출발했다. 예성강의 수심이 깊어 큰 배도 드나들었지만 물살이 세어 벽란도를 기피하고 예성강 하구에 멈추는 경우가 많았다. 하구에 내린 화물을 개경까지 운반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무악산은 비록 높지는 않았지만 패기(覇氣)를 지니고 있었다. 옹골찬 기운(氣運)이었다. 오늘날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와 연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명지대학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아우르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흡족했다. 600년 전 왕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지금의 연희동 고개다. 서운관 윤신달과 유한우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윤신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는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반대하는 윤신달에게 면박을 주어 돌려보냈다. 윤신달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른 수행원들과 의논하기 위하여 물러가자 임금이 유한우를 불렀다.

"이곳이 끝내 좋지 못하냐?"
"신이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이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 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고려 태조가 송산명당(松山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

임금은 어이가 없었다. 좌시중 조준과 우시중 김사형을 불렀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을 삼아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송경(松京)에 오랫동안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태조실록>

태조 이성계는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민망한 듯 남은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 등이 외람히 공신(功臣)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무악산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이 옳지 않다고 저지시킨다면 후사될 적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신하들의 의중을 꿰뚫고 정곡을 찌르는 분석이다. 좌중의 신하들은 많았지만 유구무언이다.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백성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태조실록>

수구세력의 저항은 끈질겼다. 왕이 이미 천도하기로 작심했는데 그 마음을 돌리려고 완강하게 버티었다. 개경에 기득권을 공고히 한 수구세력은 천도를 반대했다. 우선 새로운 도읍지에 집을 마련하는 것이 번거로웠고 개경주변에 가지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재산을 관리하는데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돌아가지 않고 무악산 밑에서 유숙했다. 야영이다. 임금의 야영이지만 별다를 것이 없었다. 평소에 전장을 옮기며 군막을 치고 야영을 했던 야전군 출신 임금이기에 왕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수행한 신하들은 전전긍긍했다.

태조 이성계의 야영은 천도 후보지를 결판 짓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임시로 마련된 군막으로 무학대사를 불러들여 식사를 같이하며 의논했다. 무악산 아래 군막에서 때 아닌 대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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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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