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송남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82년 2월 6일 군 수색대와 함께 사고현장을 수색했다. 양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에 탄 시신들을 목격했다"고 술회했다.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1] 양송남씨 "갈기갈기 찢어진 시신,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말라더라"
82년 2월 2일부터 제주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당시 신문들은 모두 "제주에 북서풍 바람이 불고 가끔 흐리고 한때 눈이나 비가 내리겠다"는 기상예보를 연달아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제주 한라산 영실매표소에서 만난 양송남(57·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씨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참 많이 왔습니다. 날씨도 많이 흐렸고. 한라산엔 1m 높이의 눈이 쌓일 정도로 눈이 계속 왔어요. 사고 전날(4일) 밤 12시경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다음날(5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진들이 한라산 등반을 해야 하는데 안내자가 필요하니 좀 협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날도 이렇게 궂은데 무슨 한라산 등반인가 생각했지만 당시 청와대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어요. 힘이 셌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도저히 등산할 기상이 아니었어요."
양씨는 솔직히 불만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등반하기 어려운 날씨에 권력을 내세워 등산로를 안내하라는 것은 '명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씨 좋을 때 오시라고 권유할 형편도 못 됐다.
당시 등산로에는 입구에만 20㎝ 이상의 눈이 쌓일 정도로 상당한 눈이 내렸다. 일반인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당시에는 변변한 등산화도 든든한 오리털점퍼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안개가 짙게 깔리고 시야거리가 50m도 안 될 정도로 시계가 무척 안 좋아도, 등반은 해야 할 처지였다.
"6일 새벽 3시경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요. 다짜고짜 용담1동 동사무소 앞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무조건 경찰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죠. 차에 타보니 동료 2명이 동행했어요. 모두 4·3제주항쟁을 겪은 탓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20~30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아라초등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이 교실에 커다란 군 작전지도를 걸어놓고 한라산 전체를 구역별로 나눠놓고 누가 어느 길로 갈지 정했습니다."
"흰 눈 위에 조각난 주검들이"
양송남씨는 50여명의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 본부 수색대 안내를 맡았다. 나머지 두 명은 어리목 길과 성판악 코스를 안내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군 비행기가 웽웽 거렸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별안간 군인들이 한라산에 떼를 지어 올라가야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안내하라니까 안내했지, 군인들에게 감히 뭘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나 포함 우리 직원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날도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 인솔자는 최락도 소령, 그 사람이었어요."
관음사 입구를 출발해 산천단 검문소로 향했다. 도로는 빙판이었고 군인들이 탄 버스가 도랑에 빠졌다. 버스를 빼내지 못해 그 때부터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공주사대 산악훈련팀을 만났는데 최 소령이 "어제 오후 3시경 산속에서 굉음을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사고로구나' 직감했다.
새벽 4시부터 걷기 시작해 낮 12시가 돼서야 탐라계곡 흙붉은오름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해발 1200m 고지였다. 점심식사로는 군인들이 짊어지고 올라온 쌀을 항고(코펠)에 넣고 눈을 퍼담아 지은 밥이 준비됐다.
그러던 오후 1시경 최 소령에게 무전이 왔다. 사고가 난 기체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양씨와 최 소령, 군인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오후 5시가 돼서야 개미등 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싹둑 잘랐더군요. 등산로에서 100m 정도 걸어들어가면 움푹 패인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 암반을 들이받은 사고현장은 무척 참혹했습니다.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죠. 최 소령이 군인들을 집합시켜놓고 업무를 나눴습니다. 시신 수습팀, 폭발물 꺼내는 팀 등으로 나눠 일에 착수하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 주저하니까 다시 재집합시키고 호통을 쳤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기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주변에는 항공기 안에 실었던 물건과 조각난 사체들이 흰 눈 위에 널려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검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 최 소령이 양씨에게 다가왔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목격한 것이니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금 이날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살아왔지요."
양씨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사고에 대해 떳떳하게 털어놓는다면서 말을 보탤 것도 없고 덜 것도 없이 당시 겪고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