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는 집안 선대의 고적들을 잘 정리하고 묶어 후대에 전한공이 크다녹우당
낙서 윤덕희는 초기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인 윤두서의 화풍을 충실히 이어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아버지인 공재의 영향이 그만큼 컸다고 할 수 있으며 낙서 또한 집안의 가풍인 박학(博學)과 기술정신을 밑바탕으로 하여 그의 회화관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낙서는 1709년 자신이 백운대(白雲臺)를 그린 부채 그림에 대해 쓴 시에서 ‘진경’에 대해 언급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기록 중 ‘진경’이라는 용어를 가장 이른 시기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윤덕희의 산수화는 초기에 이상경을 소재로 한 정형산수화를 선호하고, 안견파(安堅派)와 절파화풍(浙派畵風)등 전통화풍의 계승과 남종화풍을 익히는데 몰두하여 18세기 우리나라에 남종화풍을 정착시키는데 이바지했다.
그는 공재로부터 배운 전통화풍을 가미하여 후기에는 독자적이고 개성 있는 화풍을 형성하였는데, 관수도 ․ 관월도 등 산수인물화와 함께 원숙한 남종산수화들을 그렸다. 인물화에서는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많이 남겼으며 풍속화도 여러 점 남겼다. 이와 함께 동물화는 인마도(人馬圖), 수하마도(樹下馬圖), 용도(龍圖)와 같은 작품을 남기고 있어, ‘진경’을 통해 서양화법, 남종화법, 도석인물화, 풍속화 등 공재로부터 전승된 화법을 잘 계승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킨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윤덕희의 이름은 화가로서의 행적이 크지만 오늘날 해남 녹우당에 이처럼 많은 고적들이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은 낙서 윤덕희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선대부터 집안에 전해져 오는 수많은 고적들과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이 윤덕희다.
가장 오래된 문서로 고려 공민왕 때 만들어진 ‘지정14년 노비허여문기’또한 윤덕희가 ‘전가고적(傳家古蹟)’으로 꾸몄는데 발문에 보면 ‘중종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다시 첩으로 꾸며 놓았으니 후손들은 전가지보(傳家之寶)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집안의 많은 문집과 고적들을 잘 묶고 정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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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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