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유혹에 빠져 밤산에 오르다

'늘근백수'의 객적은 산 오르기(記) 4

등록 2007.03.13 09:16수정 2007.03.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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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해거름에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산으로 들어섰다. 이른 봄의 햇살이 빌딩 사이를 비스듬히 비껴, 무료히 인터넷을 배회하는 내 뒷창을 두드렸을 때, 나는 15살 어린 아이의 가슴아린 연서쪽지를 창 틈으로 받았을 때처럼 화들짝 놀라, 문을 급히 열며 달아나려는 햇살을 뒤쫓아 나갔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햇살은 아직 거기 있었으나 그것은 햇살이 아니었고 앞 건물 유리창에 반사된 햇살의 환영이었다. 그것도 이미 기울어 가는 햇살의 산란된 환영이었다.


내가 햇살이 굴절하는 앞 건물 유리창을 유심히 쳐다 보았을 때, 햇살은 뒤돌아서 해에게로 되돌아 갔고, 거기 유리창엔 해의 껍데기만 붙박혀서 흐릿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급히 배낭을 꾸려 홀연히 집을 나섰다. 어디서, 사라져 가는 햇살이 그들의 해를 옹위하고 자꾸 나를 유혹하며 부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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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산은 초입부터 땅거미가 어슬어슬 내리기 시작했다. 조춘의 저녁산은 공장에서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설핏 잠든 이웃 여동생의 맨 얼굴처럼 파리하고 핼쑥했다. 잎은 아직 피지 않아 나무들은 홀쭉하고 껑충하였으며, 발아래 아직 제대로 썩지 못해 버석거리는 작년의 낙엽은 이제 겨울 눈의 외투를 벗고 추레하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내 아파트 창에서 혼비백산했던 햇살은 너무 놀라서인지 대부분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한두 줄기 발 늦은 것들만 잎 떨어진 활엽수 가지 사이로 꽁무니를 드러냈다. 그것들도 지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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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사람들은 하산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아이의 손을 잡고 가족끼리 연인끼리 가벼운 산보라도 나온 듯 사람들은 팔랑거리며 하산하고 있었다. 주중의 근교 산에서 만나는 젊은이들과 색감이 달랐다. 이들은 밝고 가벼웠다.

일한 뒤에 돌아오는 일요일의 여유를 마음껏 즐기려는 듯 팔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었고 어깨에는 직접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당당함이 은연중 배어 있었다. 주중에 산에서 만나는 일없는(?) 젊은이들의 웅크린 모습과 대비되었다. 그들은 해지는 산으로 올라가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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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작은 고개를 넘어 산마루 길에 오르자 햇살들은 매복해있던 병사처럼 함성지르듯 일시에 튀어나왔다. 그들의 창은 빤짝였으나 날카롭지는 못했다. 더욱이 내가 쓴 선글라스의 방패 앞에서 그들은 무력하고 나약했다. 나는 그들을 서서히 뒤쫓으며 산마루를 내쳐 올랐다.

초봄이고 저녁이어서 대기는 서늘했으나 등허리엔 땀이 흘렀다. 한 시간쯤 지나 구룡산 정상에 도달했다. 3월의 태양은 그의 햇살을 하나씩 불러들여 그의 하루 마지막 진영 앞에 붉게 성을 쌓기 시작했다. 햇살은 점점 퇴각해 갔고 그의 성은 점점 커지며 더욱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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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넙적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풀어 와인을 꺼냈다. 입을 거쳐 식도로 흘러 내리는 와인은 퇴각하는 햇살처럼 희미하게 위 속에서 그의 진영을 틀었다. 태양이 그의 햇살을 거의 불러 들였을 때 나도 나의 와인을 있는 대로 불러 들였다.

이제 산야에 햇살은 조금치도 남아있지 않았고, 태양은 그의 주홍 성벽으로 하늘의 한 쪽면을 가린 채 깃발을 두어 번 흔들고는 성 아래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그의 성은 불 붙는 듯 타올랐다. 나의 와인도 전부 위 속으로 퇴각하였고 그것들도 천천히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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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주위에 인적은 없고 산새 몇 마리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제 잘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 졌고 나무들도 남모르게 팔을 움츠리며 그들만의 명상으로 접어 들었고 태양의 잔영으로 만들어졌던 주홍색 성벽은 전부 타서 잿빛으로 시커머 졌다. 하늘은 깜깜하나 다만 별 몇 개 나뭇가지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오도커니 떨고 있었다. 나도 으시시 추워져 자켓을 꺼내 입고는 자리를 옮겨 시가쪽을 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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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시가는 아득히 멀고 고요하였다. 거리(距離)에 의하여, 음이 소거된 TV처럼, 시가는 소리도 없이 다만 점과 선의 불들 만으로 그들이 시가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햇살이 퇴각해버린 거리, 햇살이 퇴각해버린 건물, 햇살이 퇴각해버린 공원, 햇살이 퇴각해버린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가는 어둠 속에 외롭게 떠있는 작은 은하 같았다.

가로 세로로 쉴새없이 유성은 떨어지고 건물마다 별들은 무리를 지어 빤짝였다. 햇살이 없는 그곳에선 각자는 각자가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야 한다. 건물은 건물대로 발광하고 가로는 가로대로 점등하고 차량은 차량대로 불을 내뿜었다. 그들은 자기의 빛에 의해서만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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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발광하는 것들은 좋을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를 비출 수 있을테니까. 이제 곧 밤이 아주 긴 밤이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햇살이 없는 세계. 스스로 발광(發光)해야만 근근히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를 향하여 아주 작은 손전등 하나 들고 일어나 서서히 하산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퇴각해버린 산길을 내려오는 나의 발길은 아주 자주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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