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 미국 수석대표(왼쪽)와 김계관 북한 수석대표.연합뉴스 이상학
북핵 6자회담에서 '2·13합의(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가 채택된 지 15일로 꼭 30일이 된다. 초기조치 이행 시한인 60일의 꼭 절반이 지난 것이다. 그 사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 외교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우선 북한과 미국이 수십 년씩 묵은 과제들을 협상테이블 위에 전부 꺼내놓고 하나하나 해결을 시도해가고 있다. 지난주 뉴욕에서 열린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첫 회의에서 양측이 보여준 자세는 한반도 정세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회담이 끝난 뒤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는 "초기 이행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고,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도 비핵화 초기 조치의 이행을 거듭 다짐하고 있다.
2·13 합의에 규정된 5개 실무그룹 가운데 북-일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첫 회의도 지난주 합의대로 열렸으며, 15일부터는 6자가 모두 참여하는 ▲경제·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 ▲한반도 비핵화 등 나머지 3개 실무그룹 회의가 베이징에서 차례로 개최될 예정이다.
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 일행이 13일 북한 방문길에 올라 영변 핵 시설의 폐쇄·봉인 등 비핵화 초기 조치의 감시·검증 활동을 위한 구체적 논의에 들어갔다. 모든 움직임이 합의된 일정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2·13 합의에 따른 초기단계 조치의 이행을 의심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됐다. 오히려 관심의 초점은 60일 이후의 과정도 순조롭게 합의되고 이행될 수 있을 것인지에 서서히 옮아가고 있다.
지금의 해빙 무드가 갑자기 찾아왔듯이 앞으로 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지, 혹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만큼 한반도 비핵화와 궁극적인 평화체제 만들기라는 목표 달성까지는 아직도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 나타난 쟁점과 각국의 입장을 바탕으로 향후 문제해결의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이는 비핵화 이행과정의 '5대 변수'를 짚어본다.
① BDA 동결계좌 문제 말끔히 해결되나
한때 6자회담을 결렬상태에 빠뜨린 원인이었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계좌 동결 문제는 힐 차관보의 거듭된 해결의지 확인에도 불구하고 공식 발표가 나오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고 있다.
특히 김계관 부상은 지난 10일 베이징 공항에서 "미국이 (동결계좌를) 다 풀겠다고 약속했다"며 "만약 다 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한 조치를 부분적으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다시 이 문제로 시선을 모았다.
김 부상의 말은 BDA에 동결된 2400만 달러 전액을 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그 동안의 조사에서 합법자금으로 확인된 1100만 달러 정도만 선별 해제할 것이란 관측이 유력했었다.
금주 중에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조사결과 발표 내용이 만약 북한의 '기대'와 어긋난다면 전체 협상 틀이 다시 흐트러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 정부 소식통의 전언이다.
미 재무부가 일부 불법자금을 확인한 것은 사실이나 결국 이 문제는 '정치적' 해결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북한 자금을 불법과 합법으로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위험한(risky), 덜 위험한(less risky) 식으로 분류해 마카오 당국에 통보하며, 동결해제 여부는 마카오 당국의 판단에 맡길 것이라고 정부 소식통은 설명했다.
마카오 당국의 조치는 결국 중국정부의 의지가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순조로운 협상 분위기 조성을 위해 결국 동결된 2400만 달러 전액을 풀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애초 계좌동결은 미 재무부가 BDA를 북한의 돈세탁 우려 대상기관으로 발표하고 대량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함에 따라 마카오 당국이 취한 조치이다. 따라서 해제 조치도 마카오 당국이 취하는 것이 형식논리상 맞다. 미국으로서는 '불법 활동'에 대해 조사를 행했다는 명분을 세우면서도 그 처리에 대한 책임 논란은 빗겨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동안 미묘하게 차이를 보여온 재무부의 '법대로' 입장과 국무부의 '정치적으로' 입장이 최종 발표에 어떻게 조화되어 나타날지 끝까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계관 부상이 힐 차관보와의 '정치적 합의'를 공개하면서까지 미국을 압박한 것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북한의 요구대로 2400만 달러가 전액 풀린다면 북·미 관계개선은 더욱 속도가 붙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미국이 이번 발표 이후에도 달러화 위조 등 북한의 불법 금융행위에 대한 조사는 계속한다는 방침이어서 이 문제는 일단 잠복했다가 앞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다시 수면 위로 비집고 나올 가능성도 있다.
② 북한 핵 목록 성실히 신고하나
북한의 핵 목록을 얼마나 '성실히' 신고하느냐는 비핵화 의지의 잣대라는 점에서 합의 이행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요소다. 만약 북한이 일부 대상을 제외하고 신고하거나 의도적으로 감춘다면 합의 틀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2·13 합의는 북한의 핵 목록 신고 절차를 2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먼저 초기조치 이행 시한인 60일 이내에는 '플루토늄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의 목록을 여타 참가국들과 협의한다'고 했다. 이어 흑연감속로와 재처리 시설들에 대한 '불능화(disablement)' 조치를 취하는 단계에서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해 완전한 신고'를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이 핵 목록에 무엇을 담을지는 우선 13일 방북한 엘바라데이 IAEA사무총장과의 사이에서 최초 협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6자회담 참가국들에게 보고되면 17일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인 한반도비핵화 실무그룹 회의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핵 목록 신고에서 최대의 관심은 북한이 지금까지 생산한 플루토늄의 양을 정직하게 신고하느냐와 '고농축우라늄(HEU) 의혹'을 어떻게 해명하느냐 2가지이다.
힐 차관보는 지난달 28일 하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북한이 추출, 보유하고 있는 플로토늄은 50여㎏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북한이 89년과 2003년, 2005년 세 차례 사용 후 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만들었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북한이 이보다 적은 양의 플루토늄을 신고한다면 그 차이만큼을 사용 후 연료봉으로 보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기술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사안이다.
그러나 북한이 검증에 응하지 않으면서 의도적으로 '모호성'을 유지하려 한다면 다시 지난한 협상이 예상된다. 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핵 목록 신고'와 '불능화'를 중유 100만t 상당의 에너지·경제 지원과 연계시켜 놓았기 때문에 시간을 끄는 것은 북한 스스로 손해라는 점이다.
HEU 관련 의혹은 북·미간에 어느 정도 해결방향에 대한 교감을 나눈 인상이다. 힐 차관보는 최근 북한이 한때 HEU에 관심이 있었더라도 결국 무기개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란 인식을 잇달아 밝히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과학적 동기에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를 운영해 봤다는 식으로 해명하면 될 것이다. 물론 검증 단계에서는 원심분리기의 원료가 되는 고강도 알루미늄관의 수입량과 사용처를 밝혀야 한다.
③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언제 해제하나
2·13 합의에서 미국이 초기조치의 하나로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하고, 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시키기 위한 과정을 전진시켜나간다'고 약속했을 때 그 속도를 둘러싼 북·미간 줄다리기는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주 뉴욕회담이 끝난 뒤 예상대로 김계관 부상은 이 부분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가는 곳마다 "양국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고 강조하고 다녔다.
그러나 힐 차관보는 뉴욕회담 결과 브리핑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해제를 위해서는) 북한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해 '속도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북한측 논리에 따르면 이 문제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의 잣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먼저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를 통해 관계개선의 의지를 보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경제에 숨통을 틔우려는 현실적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미국은 매년 4월 중 갱신한 테러지원국 리스트를 발표한다. 북한이 이번에 리스트에서 제외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결심'만 서면 다시 내년 4월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도중에 북한만 지정 해제를 발표하는 방법도 있다고 정부당국자는 설명했다.
④ 북·일 관계 언제 돌파구 찾나
지난주 북·미 관계정상화에 이어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일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첫 회의는 북·미 회담과 대조적인 결과를 낳았다.
양측이 이틀 동안 마주 앉은 시간은 겨우 3시간 15분. 첫날 오후 회의가 취소되는 진통 끝에 서로 기존 입장만 되풀이하다 소득 없이 헤어졌다.
물론 '납치문제'를 둘러싼 대립 때문이다. 일본측은 북한이 아직 감추고 있는 일본인 납북자와 생존자가 더 있다는 전제 하에 모든 납북자와 가족들의 조기 귀환과 진상규명, 납치 실행범의 인도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생존 납북자들의 송환과 유골 반환 등으로 양국간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현재 양측의 입장은 조그만 접점도 찾을 여지 없이 완전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2·13 합의 당시 '납치문제'에 진전이 없다는 이유로 대북 에너지·경제 지원에서 빠졌다. 이런 상태가 장기화된다면 앞으로 6자회담의 전반적 이행 틀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일본의 경제적 공헌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본이 결국 대북지원에 동참할 것이라고 낙관적 견해를 거듭 밝히고 있다. 이는 2차대전 후 일본 외교가 결코 '대세'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는 '경험칙'에도 근거하고 있다.
북·일 관계에 변화가 온다면 오는 7월 일본 참의원 선거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만약 아베 신조 정권이 패배한다면 대외정책의 방향수정 요구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승리한다면 그만큼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가 커진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그 때까지는 북·일 관계에 변화가 찾아오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현안들의 진전 속도와 북·일 관계의 불일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합의 이행의 불안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언제부터, 어떤 속도로 진행되나
북한과 미국이 지난주 뉴욕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고 밝힌 것과 관련 국내에서는 미묘한 반응이 감지됐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7일 서울정책재단 초청 강연에서 "자칫하면 북한과 미국이 한반도 평화체제의 주역이 되고 한국은 뒤에 남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가 우려한 것은 "이럴 경우 민족사적 정통성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고 새로운 남남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고위당국자도 "당장은 아니지만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이 북·미가 주도하는 구도로 흘러갈 가능성에 대해 주의하고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적 경위와 국제관계의 생리를 볼 때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을 주요 협상 대상으로 삼고 남한은 소외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은 '직접 관련 당사국들로 구성된 별도의 포럼'에서 진행한다고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는 거듭 확인하고 있다. '직접 관련 당사국'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자를 지칭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는 상황이다. 이는 1990년대 말 잠시 진행됐던 4자회담의 틀이기도 하다.
평화체제 논의가 북·미간에만 앞서가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는 것은 이 문제가 주한미군 철수 등 민감한 안보 현안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명분으로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단 등의 요구를 강하게 들고 나오면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속도다. 정부는 주한미군의 지위변경이나 군사훈련 중단 등의 조치는 남북한간 신뢰구축과 군비축소 과정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순차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사이에서 미국이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가 관건이다. 지금은 물론 한국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지만, 중동 정세가 더욱 악화되는 등의 정세변화에 따라서는 한시라도 빨리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 하는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포럼은 내달 말 열린 것으로 예상되는 6자 외무장관회담 뒤 남·북·미·중 4자 외무장관이 별도로 만나 평화체제 논의의 시작을 선언하는 방향으로 관계국간 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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