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 내 로또야, 난 대박 맞은 인생이고..."

남편이 바로 제겐 선물입니다

등록 2007.03.15 15:56수정 2007.03.16 09:4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엄.마.아.빠.사.랑.해

엄.마.아.빠.사.랑.해 ⓒ 박명순

퇴근해서 집에 들어서자, 천장 여기저기에 풍선이 달렸다. 기대심을 유발하는 메모를 적어 책장 모서리에 붙여놓고, 닫힌 안방 문엔 사탕이 걸려 있었다.


안방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엄마 아빠 사랑해'를 써넣은 풍선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 순간 가슴 가득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이놈들 보게. 바쁜 와중에 언제 이런 예쁜 짓을 했지. 아, 행복해!

어제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이자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4년째가 되는 날이다. 시끌벅적 가족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한 끼 하는 게 전부인데, 아이 둘 모두 학원 가고 없으니, 어른 셋이 모여 앉은 식탁이 왠지 썰렁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도토리 사골과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편육을 사들고 와 저녁상을 차렸더니, 제법 푸짐했다.

@BRI@건배를 하기 전에, 나는 남편 들으라는 듯이 아이들의 기특한 짓을 칭찬부터 했다.

"어휴, 애들 없으면 서러워서 어쩔 뻔했어. 내 생에 이런 이벤트도 있고 말이야."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무뚝뚝한 당신 아들을 편들며, 어머니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너희들 내 보기엔, 천생연분이여. 그동안 싸움 한 번 하길 하나. 애미 애비 서로 잘하니 그게 바로 선물이지. 자, 건배하자."

일부러 치켜뜬 눈이 멋쩍어 슬그머니 웃음꼬리를 만들며, 잔을 들어 건배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 남자는 참 속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긴 하다. TV 드라마가 나를 삐딱한 시선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가끔은 이벤트도 필요하고 선물도 필요한 것 아닌가. 이제껏 꽃다발은커녕 제대로 된 선물꾸러미 하나 받아본 적이 없다.

애 낳느라 고생했다고 제부에게 옷 한 벌 얻어 입는 동생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선물 대신 돈이나 줬으면 좋겠다며 제부의 선물공세를 은근히 자랑하는 동생 얘기에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했다.

올해 화이트데이는 더 유난해 보였다. 제과점마다 이벤트를 열어 입구를 풍선으로 장식하고 그 앞에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남자들을 이해하지 못해 결국 남편은 혀를 끌끌 찼다.

"아니, 무슨 사탕이 4만원씩이나 해? 돌았군, 돌았어."

먹을거리를 차에 싣고 지하주차장에 들어서니, 다른 날과 달리 텅텅 비어 있는 곳을 보며 또 한마디 했다.

"아니, 화이트데이가 무슨 대단한 날이라고 이렇게 주차장까지 텅텅 비냐고. 다들 어디 외식이라도 하러 갔나부지?"

자신도 스스로 멋쩍었던지 계단에 올라서다 말고,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니도 그런 거 받고 싶냐? 그런 허접 선물 말고, 나는 나를 너한테 다 주잖아. 그럼 됐지, 안 그래?"

누가 뭐라 했나요. 암말도 않고 있는데 혼자 북 장구 장단 다 맞추네. 솔직히 가끔은 겉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저희들 부모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함으로써 아이들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고 싶어서였다.

톡 까놓고 말해서, 이제 나는 남편이 특별한 날에 선물을 내놓지 않는다고 해서 별로 섭섭하지 않다. 그의 하루가 온전히 나와 내 가족의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회사에서조차 쉬는 시간 틈틈이 아이들의 학습 내용을 미리 보아 두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가족들의 소망 상자에 담긴 소원들을 하나씩 들어주기 위해 남편은 오늘도 동분서주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애먼 사탕 값만 탓하던 남편이 마음에 걸려 오늘 아침 출근하자마자, 메신저를 열어 말을 붙였다.

"여보, 고마워. 당신 참 멋진 아빠야. 내가 너무 부족해서 당신 혼자 모든 걸 감당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해."

마치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듯, 남편은 메신저 창에서 마치 손사래를 치듯 대답해 왔다.

"뭘 모르는 소리. 닌, 내 로또야, 로또. 난 대박 맞은 인생이라구."

이 말보다 더 귀한 결혼 기념 선물이 또 있을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2. 2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5. 5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