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인권실천시민연대에서 매월 네번째 수요일에 진행하고 있는 [수요대화모임] 2월 강연자로 나선 피우진 예비역 중령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피 중령은 지난해 11월 유방암 치료를 위해 가슴을 절제한 것이 빌미가 되어 본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전역조치 되었다.
군에서 27년 9개월을 복무하고 지난해 11월에 전역했다. 내 삶은 군에서 시작해서 군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해서인지 아직도 군에 있다는 착각을 하고, 요즘도 새벽 5시면 일어난다. 전역을 한지 벌써 90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상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군이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직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여군의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여군은 올해로 창설된 지 57년이 됐다. 성숙되기에 충분한 나이지만 아직도 여군의 위치와 정체성은 모호하다. 그것은 57년의 역사 속에서 40여년을 ‘여군’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군인이 아니라 '여군'이기를 강요했던 군
@BRI@군에는 병과라는 것이 있다. 같은 육군이라도 주어인 임무가 보병이냐 포병이냐, 혹은 항공이냐 하는 것에 따라 하는 일도 다르다. 이를 병과라고 한다. 그런데 여군은 병과가 여군이었다.
1979년 청운의 꿈을 안고 자원입대를 했다. 군을 지원했던 것은 당시 지금보다 더욱 심했던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이 군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급은 있지만 계급 안에서는 평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업무가 여군이었다. 여군들만 모아놓고, 여군 안에서만 생활하게 했다. 부사관들은 행정지원 등 보조역할을 하고, 간부들은 부사관들을 관리하는 일이 업무였다. 물론 군인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군사훈련은 받았지만 여군은 그 자체가 더욱 철저히 여성을 차별하는 시스템이었다.
여군에게 요구하는 외모도 문제였다. 여군들에게도 남자 군인들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게 했다. 그런데 여군 후보생들은 훈련을 받는 기간 내내 아침에 ‘화장상태’를 점검했다.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화장을 할 필요도 없고, 해봤자 금방 지워진다.
그런데도 화장상태를 점검하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면상태불량’이라는 이유로 벌점을 줬다.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면상태가 불량하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후보생 동기가 12명이었는데, 화장할 시간이 없어서 빨간색 립스틱 하나를 놓고 화장한 것처럼 입술만 빨갛게 바르기도 했다. 머리 길이는 남자처럼 짧게 자르게 해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주고, 화장으로 ‘여성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여군에 대한 불합리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80년대 초부터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확대되어 가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여군에게도 업무를 주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헌병, 정보를 비롯해 여성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몇 가지 분야에 업무를 주기 시작했다. 항공도 이때 생겼다.
여군에게도 업무가 주어지면서 무언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항공을 지원했고, 조종사 생활을 시작했다. 4년여를 항공부대에서 헬기조종사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군은 군종, 법무 등과 같은 특수병과여서 전과가 안 되었다는데 있다. 항공부대 소속의 조종사들은 병과가 항공이기 때문에 조종을 하는 것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인데, 여군은 조종사 역할은 수행하지만 병과는 여전히 여군이었다. 당시 여군 3명이 함께 근무를 했는데, 근무하는 내내 파견근무였다. 사정이 이러니 항공에서는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관리를 해주지 않았다.
또 조종사도 자격증만 따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등급 승진이 필요하다. 부조종사에서 정조종사, 교관조종사, 시험비행조종사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승진은 비행시간과 그에 따른 교육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계급 승진도 초등군사반 교육이니 고등군사반 교육이니 하는 계급에 따른 필수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런 기회도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은 지나 계급 승진을 해야 함에도 교육을 받지 못해 계급 승진도 못하고, 역시 교육을 받지 못해 조종사 등급 승진도 하지 못했다. 결국 3명 모두 남자 후배들 옆에서 부조종사 역할만 하다가 84년에 여군으로 복귀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여군이 군인으로 인정받기까지 40년
여군 장교는 결혼에도 제한이 있었다.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아이를 낳으면 전역을 해야 했다. 부사관들은 아예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여군들이 결혼 때문에 군생활을 포기하고 사회로 복귀하고는 했다. 이런 불합리한 부분은 89년에 군인사법이 바뀌면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여군병과도 이 때 조정되어 여군에게도 그 자체가 병과가 아닌 남자 군인들처럼 병과에 따른 업무가 주어졌다. 그런데 영관장교(소령 중령 대령)들의 경우 마땅한 병과업무에 대한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아 대령이 소령 때 가는 육군대학을 가고, 소령이 소위가 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 교육 동기들 중에 언제나 최고참에 최고계급이었다. ‘고문관’이지 않았겠는가.
나 또한 7년 만에 다시 항공으로 가게 되었다. 공백을 메우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하루 종일 비행을 해도 비행시간을 만회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중령 계급들이 가지고 있는 비행시간보다 훨씬 적은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다. 또 그걸 빌미로 참 많은 차별과 멸시를 받았고, 계급에 맞는 보직도 주지 않았다.
그나마 그렇게 된 것이 90년대 초반부터니까 이제 17년 정도 되었다. 결국 여군은 40여 년 동안 한편에서는 여성이기를 바라고 또 한편에서는 남성들과 동일할 것을 강요하는 모순된 구조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여성의 역할’을 강요하기도 한다.
또 여군에 대한 제도적 변화는 많이 있었지만 여전히 군 시설은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기본적인 편의시설조차 갖춰져 있지 않다. 특히 훈련장에서의 화장실 문제는 대표적이다. 남자 군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이동식 화장실을 가지고 나가면 좋으련만 아직 우리 군의 장비가 경량화되어 있지 않아 이동식 화장실 하나 실을 데가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소변은 막대만 꽂아 놓은 간이화장실을 쓰고, 대변은 천으로 사방만을 가린 임시화장실을 쓴다. 그러니 여군들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겠는가. 여군에게는 훈련이 아니라 그런 것과의 싸움이었다. 방광염에 걸리는 후배들도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후배 중에 하나가 그런 말을 했다. “빨간 마후라고 지랄이고 똥이나 한 번 실컷 눠봤으면 좋겠다.”고.
또 훈련을 나가면 여럿이 함께 자는 텐트를 치기 때문에 중대장 소임을 맡으면 병사들과 함께 써야 한다. 잠을 자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생리적인 현상 등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옷은 갈아입을 수도 없다. 아직까지 이런 것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여군을 받아들일만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놓고, 모든 문제는 개인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다. 여군을 받아들였으면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기본적인 시설도 갖춰야 한다. 그게 기본인데 그게 안 되어 있다.
군 시스템은 아직도 멀었다
장교나 지휘관들의 사고도 많이 바뀌어야 한다. 국가가 장교로써 그에 맞는 권한을 준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려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전투에서 생사여탈권을 가진 책임자로서 그에 맞는 권한을 준 것이다. 그런데 많은 지휘관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권력’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
내 문제도 암에 걸렸을 경우 전역할 수밖에 없다는 낡은 규정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규정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규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정은 이미 사문화되어 있었다. 치료받고 복귀해서 근무하는 분들도 많고,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 부대에서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다. 지휘관들이 배려를 하는 것이다.
나도 2000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지만 복귀해서 4년을 근무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지휘관이었다. 처음 복귀했을 때 지휘관은 암을 딛고 일어나서 근무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부대원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근무를 하면서 내가 암에 걸렸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열심히 생활했다. 그런데 나중에 새로 온 지휘관이 규정을 내세워 문제를 삼았다. 항공부대에 근무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서 비행자격에서 해임을 시켰다.
과정도 문제다. 어제까지 동료, 부하들과 함께 근무하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보직해임도 아니고 조종사 자격을 박탈해서, 병력을 조사해야 한다며 병원으로 보내버렸다. 당시에 난 교육생들을 훈련시키는 지휘관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프지 않으니까 금방 복귀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인사도 못하고, 지휘관 인수인계도 못하고 병원을 갔다. 그리고는 전역이 되어버렸다. 사람을 사람대접하지 않는 군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군에서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 또한 병사들이 훈련 받기 싫어해서가 아니다. 병사들이 군을 이루는 하나의 도구로만 취급받을 뿐 사람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군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렇기 때문에 변화시켜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을 중심에 놓고 모든 시스템이 움직일 수 있게 바뀌도록 싸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역을 받아들여도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누가 또 언제 군의 문화와 인식에 대해 지휘관의 권력 앞에서 얘기할 수 있겠는가. 후배들이 전화하면 불이익을 받을까봐 연락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군은 여전히 내게 매력적인 집단이다. 국가수호라는 군의 가치는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이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군도 변해야 한다. 그래야 군도 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권연대 허창영 간사가 정리한 것입니다.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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