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창에서 그 출생년도가 검색되지 않는 임백령은 성종 11년인 1498년, 무오년 8월 26일 생이다.임윤수
그렇다고 임백령의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건 아니다. 임백령의 묘비문과 선산임씨 족보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임백령은 1498년 8월 26일생이다. 1498년도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끝에, 유자광 등의 훈구파가 김일손 등 사림파를 처형하고 귀향 보내는 등 인적청산을 시도하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있던 김종직을 꺼내어 부관참시까지 한 것으로 알려진 무오사화가 있던 해였다.
무오년에 태어난 임백령이 명나라 사은사로 다녀오다 병을 얻어 사망을 한 1546년 역시 병오년으로, 무오년이나 병오년에 들어가 있는 오(午)자는 공교롭게도 공히 12지간 중 말(馬)을 뜻한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오던 임백령은 장도에 깊은 병을 얻어 더는 움직이지를 못하고 영평에서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영평에서 치료를 받으며 머물던 어느 날, 임백령은 시중을 들던 하인에게 "올해가 무슨 해인가"하고 물으니 신하가 "예, 병오년입니다"하고 답을 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임백령이 "뭐라고? 병오년!"하고 되물었으니 이 해가 1546년 병오년이다.
임백령은 올해가 병오년이라는 말을 듣고는 장탄식을 하며 "어허∼ 내 목숨이 여기서 다하는가 보구나",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태어날 때와 같은 말의 해가 되는 오(말)년이 되었으니 꿈속에서 백발노인이 지어준 괴마라는 호에 담긴 뜻을 그때야 깨달았다고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용하였을 본인의 호 괴마에 담긴 뜻을 영명한 임백령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안타까운 부분이다.
시생으로 과거에 응시해 우의정까지 승승장구를 한 임백령이었지만 권력의 반대급부인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느니 권력과 출세가 그의 영명함을 가린 미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임백령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암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의 공으로 위사공신 1등 숭선부원군(崇善府院君)으로 책봉되며 우의정까지 득세하지만 시대가 바뀌니 결국은 선조 3년, 1570년에 모든 관작을 추탈 당한다.
1546년 6월 29일, 명나라를 다녀오던 길에서 병사를 한 임백령의 산소를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관산리에 썼다 지난 19일 파묘를 하여 후손들이 집촌을 이루고 있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종중산으로 이장을 한 것이다.
산소를 이장하는 진짜 이유
461년 동안 무탈하게 있던 임백령의 산소를 후손들이 살고 있는 괴산으로 이장한 데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관리상의 문제다. 그동안에는 산소에 딸린 토지를 경작하며 산소를 돌봐주는, 소위 산지기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얼마 전 그분이 돌아가시며 더는 산소를 돌봐줄 여력이 없어졌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있어 중시조(선산임씨 괴마공파)가 되는 할아버지의 산소를 돌볼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묘지 관리만을 위해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궁여지책으로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괴산 쪽으로 이장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