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선대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이승숙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해 내려오는 피라미드형 돌무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돌무덤이 한 기 있다. 바로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을 모신 능이다. 비스듬한 산기슭을 의지하여 수만 개의 잡석으로 쌓아올린 이 무덤은 모두 7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의 너비는 약 20미터, 전체의 높이가 7.15미터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이 능은 왕릉으로 관리되어 오다가 인진왜란 이후로 잊혀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조 때 기우제를 지내고 오던 고을의 한 좌수가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기록들을 능 근처에 있던 절의 대들보 위 나무 궤에서 찾았다고 한다. 그 궤에는 구형왕릉이라는 기록과 왕과 왕비의 영정, 갑옷, 칼 등이 들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이 능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해평야의 곡창지대에 터를 잡고 나라를 일으킨 가야는 시조대왕인 수로왕으로 부터 해서 10대 임금인 구형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신라의 침입으로 나라가 한 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신라의 법흥왕은 서기 532년 대군을 이끌고 가야를 쳐들어간다. 구형왕은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법흥왕께 무릎을 꿇는다. 최후의 일인까지 목숨을 건 싸움보다는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죽기보다 힘든 양위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김해의 기름진 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은 법흥왕은 약속대로 가야의 백성들을 차별없이 대한다. 그리고 구형왕을 양왕으로 봉하고 구형왕의 자녀들과 신하들에게도 능력에 맞는 직책을 준다.
하지만 구형왕은 국통을 잇지 못한 죄인이라 스스로 칭하시며 가족들을 이끌고 산청으로 내려와서 칩거하게 된다. 그리고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구형왕은 죽기보다 더 어려운 결정을 내린 임금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안위를 위하여 나라를 양위하였다. 쉽지 않은 결단으로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는 약속을 지켜 가락국의 백성들을 흡수하여 이후로 국운이 크게 흥하게 되었다. 나중에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은 구형왕의 증손자가 된다.
만일 신라의 침공 때 죽음으로 결사 항전을 했더라면 김유신과 같은 불세출의 영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김해 김씨가 번성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시하여 무수한 인재들이 양왕의 뒤를 잇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현명한 선택을 하셨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