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물고기는 꽃을 피운다

[서평] 길상호 시집 <모르는 척>

등록 2007.03.22 17:16수정 2007.03.2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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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길상호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발간했다. 3월 초, 그가 "좋은 봄날 되세요"라는 인사말을 담아 보내준 시집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은 첫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를 펴낸 지 3년만의 일이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과의 시간적 거리는 3년밖에 안 되지만 이 시집들이 안고 있는 내용면에서 본다면 많은 차별성을 드러내 보인다. 첫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가 주로 자연과 주변 사물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끌어안는 서정(抒情)이 중심이었다면 이번 시집은 세상과 자신의 내면에 드리워져 있는 불안과 고통을 주로 담고 있다.


인터넷 화면 속 떠다니는 사진
길상號를 만났지
어느 바다에서 밀려왔는지 개펄에
닻을 내린 배 한 척
마냥 신기해서 스크랩을 해두고
보다가, 보다가, 눈물이 났지
물을 떠나서 다리 잃은 배
기우뚱, 일어서지 못했지
펄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지
바다로 이어진 물길 마르면
허연 소금 묻히고 녹슬어갈
길상號는 튜브를 몇 개 부레처럼 달고
헐떡이고 있었지
밀물이 들지 않는 모티터 속에서
힘차게 힘차게 노를 저어도
너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었지
바다가 없어도 물고기 건져야 하는
그 밤 나는 가여운 어부가 됐지 - '길상號를 보았네'전문


인용한 시 '길상號를 보았네'는 시인의 이름 '길상호'에서 '길상號'라는 배 한 척을 건조(建造)한 기발한 착상의 언어적 유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개개인의 사람은 시간이라는, 세상이라는 저 망망한 바다에 떠 외롭게 유한(有限)의 길을 가고 있는 한 척의 배가 아닐런가. 그것을 '길상號'로라는 배 한 척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그 '길상號'가 처해 있는 상황이 참으로 절망적이다. "다리 잃은" "기우뚱, 일어서지 못"하는 "수렁"에 갇혀 "허연 소금 묻히고 녹슬어갈" "헐떡이고 있"는 '길상號'의 모습. 이는 시인이 세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것인데, 이러한 도저한 부정적 인식으로 길상호 시인이 이 세상을 읽어낸다. 그 어둡고 절망적인 빛깔이 시집 <모르는 척>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길상호의 두 번째 시집 <모르는 척>을 두고 시인 이재무는 시적 주체의 내면적 현주소를 반영하거나 표상하는 사물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시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사물어는 '물고기'인데, 시의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한결같이 상해를 입었거나, 다른 주파수를 지녔거나, 다른 농도 속에 살고 있거나, 화상을 입었거나, 狂魚가 되어가고 있거나 지독한 비린내(언어)를 풍기고 있다. 이는 시인과 동일시되는 시적 주체가 외적 억압의 현실 속에서 囚人의 시간을 가까스로 견인해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 시대 몸피 작은 시인의 초록처럼 여리고 섬세한 감성이 가공할 자본의 무차별적인 횡포와 공세에 무방비로 철저히 유린당하는 현실이 아프고 괴롭다."


시집 <모르는 척> 수인(囚人)의 현실 시간을 헤쳐 나가는 길상호의 목소리는 고통과 절망의 소리다. "울고 울어도 끝내 들을 수 없는 곳"('심해, 그리고 호수'), "저린 고통을 받아/오늘도 모르는 척,/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모르는 척, 아프다'), "바닥에서 닳아버린 시간을 따라/다시 걸어야 할 시린 발목,"('구두 한 마리'), "몸의 그늘 다 태우고 나면/그때서야 날갯짓도 가벼워질까"('나방의 날개'), "뜯어먹을 건 네 몸뚱어리뿐/매운 눈물이 너를 삼켜도/양파야 싹을 올리지 마라"('양파야 싹을 올리지 마라'), "비로 져버린 꽃잎 문도 못 찾고/언제나 마음 젖어 헤매는 사람"('붉게 익은 뼈'), "오체투지, 온몸 발이 되어 걸었다네/이리저리 숨어 다니던 두려움이/깨지고 깨져 피를 흘렸다네"('다큐멘터리'),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써도/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도무지') 등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병든 세상을 향해 시의 눈(詩眼)으로 헤엄쳐 가는 길상호라는 물고기는 눈도 충혈 되고 몸도 찢기는 고통을 입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병든 세상을 탐색해 들어가는 그의 시작(詩作) 행위는 멈춤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거듭 물고기가 꽃을 피우다 보면 '자서(自序)'에서 밝힌 것처럼 활활 세상을 밝히는 심해에 다다를 것이다.


세상의 벌어진 틈 사이를 메우는 일, 그 일이 험난하긴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길상호 시인에게 우리들의 기대는 크다. 길상호라는 물고기는 끝내 심해에 다다라 커다란 꽃을 마침내 피우고야 말 것이다. 아래의 시를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확신한다.

반야사 앞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주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틀을 잡아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순간순간 탑신의 불안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싶던 내 몸도 살짝
저 빈틈에 끼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 '돌탑을 받치는 것' 전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척 - 개정판

길상호 지음,
천년의시작,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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