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문학, 환멸의 민주주의를 넘어

[서평] 김명인의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등록 2007.03.23 10:16수정 2007.03.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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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자 계간 <황해주간>의 편집주간이며 대학교수이기도 한 김명인은 이른바 긴급조치 세대다. 70년대 긴급조치령은 헌법의 상위법적 권능을 가진 박정희 왕국의 총칼이었다. 단지 아홉 번 발표된 그 긴급명령에 의해 이 땅의 민주주의는 죽어 갔고 인권은 말살되었으며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희망은 사전 속의 낱말로 박제되었다.

다행히 긴급조치를 지나 광주의 피울음을 뒤로 하고 보통사람의 사기극을 끝으로 문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에 이르는 사이, 긴급조치 세대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바라마지 않던 민주주의는 왔다. 적어도 형식적 제도적 민주주의의 새날은 열린 것 같다. 그 사이 많은 긴급조치 세대들 또는 혁명가들은 저마다의 명분과 실리를 찾아 자신들이 등을 눕혔던 차디찬 바닥을 떠났다.


긴급조치세대들의 대부분이 뒤늦게나마 찾아온 민주주의의 달콤한 과즙을 즐기는 이 때에도 김명인은 여전히 수인(囚人)이다. 다른 긴급조치세대들이 통과의례처럼 지나온 그 시간을 그는 아직도 통과하지 못하고, 아니 통과하기를 거부한 채, 자신을 70, 80년대의 희원 속에 가두고 있다. 그것은 그가 악법에 의한 법정범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간절히 원했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가 택한 문학평론은 폭력에 대항하는 창이었고 압제에 저항하는 방패였다. 스스로 밝힌 대로 그의 비평문들은 '문예물'일 수 없었고 사회평론이었고 정치평론이었다. 많은 문인 지식인들이 글로 독재정권과 싸웠듯 그도 거대한 폭력과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다. 싸울 적이 없어진 세상이 아니라 더욱 음흉해지고 교활해진 더 힘 센 적과 싸워야하는 세상이 왔다. 그 적 혹은 세태와 싸워야하기에 김명인에게는 새로운 무장이 필요했다. 그 싸움의 무장과 기록이 오늘 소개하는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다. FTA, 대선... 시절이 하수상하여 다시 읽는다.

새로운 싸움의 양식-1부, 2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문학평론은 나의 정치의식을 담는 가장 유효한 그릇이었다. 하지만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도 다시 그런 시대는 오지 않았다. 문학은 한갓 쇼핑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문학평론은 광고문구이거나 장식물로 타락했다. 나는 문학에게 다시금 세상을 성찰하고 바꾸는 영혼의 무기로서의 지위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학이 왜소해지고, 볼썽사나워지는 동안에도 세상은 제 갈 길을 갔고 그렇게 제 갈 길을 가는 폭주기관차 같은 후기 자본주의 속의 한반도와 세계에 대해서 문학평론이 아닌 방식으로' 김명인은 싸움을 건다. 남한의 눈부신 민주화라는 것도 결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이름의 또 다른 식민체제의 구축과정에 불과하다는 그의 인식 때문에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택한 싸움의 양식은 원고지 열 장 내외의 짧은 글이고 마침 들어온 언론 매체의 청탁은 그에게 전장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그 짧은 글을 가지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외피를 입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파괴적 적대성의 발톱을 숨긴 흉악한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 한 때 동지였던 이들이 민주주의의 찬가를 부르고 신장된 인권의 만가를 부를 때, 유독 그는 왜 그렇게 알아주지도 별 효과도 없어 보이는 싸움을 하는 걸까. 그것은 엄격함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엄정함, 그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온갖 기만적인 세태에 대한 엄정한 성찰을 행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책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례사 비평이라 일컬어지는 메이저 출판사들의 문학외적인 횡포(자본주의적 부정성)를 꾸준히 지적해야 하고 스스로 어떤 출판사 또는 책에 발문이나 해설을 쓰지 않아야 한다. 문부식의 경우처럼 세상의 변화에 편승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한 자의 변명은 구차한 자기 부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친절히 일러주어야 한다. 한 때 희망을 걸었던 노무현 정권의 기만성(이라크 파병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

새로운 문학의 모색-3부, 4부

책의 1, 2가 80년대 혁명의 순수와 이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고집스런 지식인이 변절한 세상에 대하여 던지는 일갈이라면 3부와 4부는 9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의미에서의 제 역할도 제 색깔도 가지지 못한 문학에 대한 절망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김명인의 고뇌가 담겨 있다.

"90년대의 문학은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정치적 과제들을 거의 완전히 방기해 왔다... 동시대 문학에 정치적 상상력의 복원을 요구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만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나는 민주주의와 정치를 말하는 나와, 문학을 말하는 나로 분열된 채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치를 말하는 나와 문학을 말하는 나로 분열되었다는 고백은 바로 이 시대의 문학이, 혹은 문학이 담당해야할 전망의 생산이 현실의 그것과 유리되었다는 진단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80년대의 문학이 가진 역사 정치성의 과잉이라는 문제와 90년대 문학의 개인 일상성의 과잉이라는 문제를 발전적으로 해결해야하는 것이 2000년대의 문학이 가야할 길이라는 김명인식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2000년대의 여명은 밝아오지 않은 듯이 보인다. 김명인의 생각에, 특히 90년대를 지나 지금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군(김인숙, 하성란, 김승희, 김훈, 이승우, 이응준, 윤성희, 공지영 등)에게 그 여명을 기대하기 어려운 듯이 보인다. 90년대를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새롭게 비판하고 나설 싱싱하고 젊은 2000세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80년대와 90년대의 치열한 자기비판 및 그에 기초한 비판적 상호개입과 대화적 소통이고 이를 통한 80년대적인 것과 90년대적인 것의 동시적이고 생산적인 극복이라고 생각한다."

김명인 스스로 이 책에서는 문학과 정치로 분열되었다 말하지만 기자가 보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이 우리를 철저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과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 갈라놓았다. 다만 우리는 그처럼 고난을 가기보다는 안락을 택했기에 알아채지 못 한 것이다. 문학에 환멸만이 드러나고 정치에 배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세상은 분명 올바른 세상은 아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은, 그래서 정치에는 환멸뿐이라며 우리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를 도외시하고 그 진정성을 담보해야할 문학의 통속적 배반을 당연시 받아들인다. 오히려 신변잡기의 서술에 그치는 그 배반의 문학을 즐겨 읽는다. 김명인식 결론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한 인간의 고집스런 엄격함을, 엄격한 한 인간을 만나는 것은 행복하다. 또한 그의 경고를 새기는 것은 시원한 전율이다.

"가난한 시민들은 밥을 먹여 준다는 보장만 된다면 언제든지 그까짓 민주주의 따위는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파시즘이 탄생한다."

덧붙이는 글 | *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우리시대의 논리3/김명인/후마니타스/10000원
* 유포터, 엔시엔뉴스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우리시대의 논리3/김명인/후마니타스/10000원
* 유포터, 엔시엔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김명인 지음,
후마니타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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