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는 명나라

[태종 이방원 61] 권력은 칼 끝에서 나온다

등록 2007.03.25 16:21수정 2007.03.2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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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은 송악을 주산으로 하고 용수산을 안산으로 한 아담한 도읍지다. 좌청룡 부흥산과 우백호 오공산을 감싸 안고 용수산을 바라보며 오천(烏川)과 백천(白川)을 얻었으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형 천하의 명당이다. 장풍득수란 바람을 잘 갈무리하여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까마귀(烏川)가 알을 낳으면 검정색일까? 하얀색일까?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경하해야 할 일일까? 조종을 울려야 할까? 고려를 뒤엎은 새 왕조가 웅비를 준비하고 있으니 명당일까? 흉당일까? 아무튼 또 하나의 왕조를 낳았으니 생산성은 높다.

개경의 동대문은 숭인문이다. 한양과 삼남지방으로 연결되어 일본으로 통하는 문이다. 개경의 서대문은 선의문이다. 평양과 의주를 거쳐 대륙으로 통하는 문이다. 회임한 아내와 작별하고 대궐에서 임금에게 예를 갖춘 사신 일행은 선의문에 잠시 멈추어 섰다. 대궐에서 배웅 나온 환송객을 돌려보내야 할 지점이다.

개경은 북으로 송악과 남으로 용수산을 축으로 궁성(宮城)과 황성(皇城) 그리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겹겹이 싸인 요새다. 선의문은 외성의 성문이다. 선의문을 지나면 개경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궁성이 눈에 들어왔다. 임금이 있는 곳이다. 궁성을 바라보며 목례를 올린 방원은 고개를 들었다.

잘 있거라 송악산아 다시 보마 숭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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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송악산. 북한 화가 서순천의 작품이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의문이다. ⓒ 서순천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령한 산이라 하여 개경인들이 숭상하는 송악산은 방원에게 고향과도 같은 산이다. 개경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자라서 혼인하고 청운의 꿈을 펼치던 곳이다. 그러한 송악산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꼭 다시 볼 수 있다'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또 하나 이방원을 짓누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으니 암살음모였다. 고려 패망에 분노한 고려의 유민들이 사신단 여정의 길목에서 방원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였다. 방원은 추동에 칩거하면서도 사설 정보팀은 가동하고 있었다. 사설 정보팀에 접수된 첩보에 의하면 정몽주를 격살한 방원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돌아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겠지? 사내 녀석일까? 계집아이일까?"

개경에서 금릉까지 8천리 길. 왕복 1만6천리 길. 다녀오는데 장장 6개월이 걸리는 머나먼 길이다. 항공기나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등 관리들은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을 타고 가지만 마부는 걸었다. 걷는 속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다.

벽란도에서 나룻배를 타고 예성강을 건넌 사신일행은 평양을 거쳐 의주관에서 묵었다. 의주목사의 대접이 융숭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신단 일행에 왕의 아들이 포함되어있으니 지방 관리가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의주목사의 환송을 받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6년 전. 이색(李穡)을 수행하여 서장관으로 난생처음 국경을 넘을 때와 같은 설렘은 없었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푸른 물을 보며 "압록(鴨綠)빛 저 강물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겠지?"라는 조바심은 가시지 않았다. 압록강은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을 닮았다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명나라 방문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긍지도 있었다. 그때는 고려가 독립국임을 포기하고 감국(監國-신탁통치)을 요청하러 가는 고려의 사신이었고 오늘날에는 신생국 조선의 사신단을 이끌고 가는 정사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는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도 잠시, 자신의 임무가 조공국임을 확인하여 달라는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다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 조국이 왜소해 보였고 자신이 처량해 보였다. 그것은 약소국 외교사절의 비통한 감정이었다. 머리를 조아리지만 비굴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성문을 열고 마중 나온 요동성주, 놀라운 변화였다

요동에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요동도사가 성문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던 요동 성주였다. 조선국 사신을 황제가 매질하여 보내던 명나라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태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였다.

명나라 예부에서는 조선 사신단의 명단을 받아보고 자신들이 의도한바 대로 조선이 굴종했다고 받아들였다. 조선 국왕의 아들 이방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의 임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임무 그 자체는 요식행위일 수 있었다. 누가 오느냐가 관건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이성계 이후의 조선을 면밀히 분석해놓고 있었다. 조선이 나이 어린 방석을 세자 책봉해놓고 있었지만 즉위까지는 머나먼 길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실력자 정도전이 부상하고 있지만 세자 방석이 무너지면 와해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기반이라는 진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정도전이 병권을 쥐고 있었지만 군권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군권 없는 병권은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오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처음 말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중국인들의 의식세계에서 "권력은 칼끝에서 나온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중국의 역사가 그렇다.

지금은 수면 아래서 몸을 낮추고 있지만 혁명의 일등공신 이방원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정치란 과거를 오늘에 평가하여 내일을 치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방원이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위하여 입국했으니 이성계 이후의 조선을 손아귀에 넣는 셈이었다.

요동도사가 마련해준 객사에서 노독을 풀었다. 지난번 사신 길에서 뒷골목 허름한 여관에서 묵었을 때와는 격이 달랐다. 요동도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금릉을 향하여 떠나려는데 요동도사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연경에 있는 연왕께서 들려 가시라는 분부입니다."

연왕의 초대였지만 명이었다. 연왕이 누구인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연경(북경)을 분봉(分封)받아 통치하고 있는 왕이지 않은가. 황태자로 책봉된 큰형이 죽고 조카가 황태손에 책봉되었지만 변혁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잠룡(潛龍)이었다. 훗날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조카 윤문(允炆-건문제)을 불태워 죽이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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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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