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59회

등록 2007.03.26 08:18수정 2007.03.26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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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자네는 어디를 다녀온 건가?”


혹시나 해서 중의의 방에 들렀던 성곤이 의자에 드러눕듯 앉아있는 중의를 보고 물었다. 중의의 모습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탈진해 보여 어제 저녁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으응….”

대답하기조차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는 중의를 보며 성곤이 근심스런 표정을 띠었다.

“어디 아픈가? 의원이 병이 나면 누가 고쳐주겠나? 헛헛….”

걱정을 하면서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자 그제야 중의는 탈진한 몸을 조금 곧추 세워 앉았다.


“조금 피곤할 뿐이네. 아침을 걸렀더니 그런가 보네.”

“아니, 아침을 걸렀단 말인가? 지금 때가 언젠데. 그럼 자네는 점심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로군.”


성곤의 말에 중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는 중천에서 서쪽으로 약간 기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시(午時)가 지나 미시(未時) 정도는 족히 되었을 듯싶다.

“도대체 자네는 어디를 다녀온 거야? 아침 내내 찾아도 보이지 않기에 만보적에게 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네.”

“그저 이리저리 생각할 일이 있어 걸었다네.”

“원… 무슨 그리 걱정되는 일이 있어 혼자서 그랬단 말인가? 그렇다 해도 추산관 태감이 들어오는 사실은 알았을 터인데 왜 마중을 나오지 않았나?”

추산관 태감의 운중보 입보(入堡)는 운중보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요란했다. 인원을 줄이기는 했다지만 마치 중앙 고위관리가 지방 순시를 하는 행렬과도 같아서 관속들만도 거의 삼십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응…? 추태감이 벌써 들어왔단 말인가?”

약간은 놀라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추산관 태감이 운중보에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빨라야 오늘 오후쯤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군.”

“말도 말게. 추태감은 무슨 전쟁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삼재팔번(三才八幡)을 모두 대동했네. 나머지도 동창의 범상치 않은 고수들로 생각된다네. 얼마나 기세가 등등하게 들어오던지….”

중의는 드디어 추산관 태감이 칼을 뽑아 들었음을 알았다. 삼재팔번(三才八幡)은 추산관 태감의 측근으로 사조직에 다름없었다. 삼재(三才)는 천지인(天地人)이란 명호의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문무겸비의 인물들을 말하고, 팔번(八幡)이란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고수들로서 동창을 움직이는 여덟 명의 실질적인 수뇌 인물들이었다.

군문의 조직보다 더 치밀하고 뛰어난 고수들로 이루어졌다는 동창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은 웬만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렇듯 여덟 명 모두가 움직인 것은 초유의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전 운중선에는 추태감만 들어온 건가?”

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이 등골을 훑고 내려갔다. 예상하지 못한바 아니었지만 동창의 실질적인 전력을 모두 동원했다는 점에서 추태감이 앞으로 행보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청문이 들어왔네. 철기문의 당주를 포함해 고수 일곱 명을 대동하고 있더군.”

청문은 모른다. 또한 그의 형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혈간도 모르고 있었다. 운중보의 후계구도는 단순히 운중의 뒤를 잇는 것이 아니었다. 철기문의 전력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후계구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청문이 철기문의 전력을 대동하고 운중보에 들어왔음은 아직까지 혈간이 왜 죽어야했는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괴상한 놈 둘이 들어왔네. 피부가 시커먼 놈은 백의를 입고, 피부가 유독 흰 놈은 흑의를 입었는데 냉기가 풀풀 날릴 정도로 차가운 인상을 주는 놈 둘이라네. 그들은 관 하나를 메고 들어왔는데 곧 바로 만보적의 거처로 향하더군.”

“흑백쌍용(黑白雙龍)인가? 재보 이 친구 역시 위험한 일을 벌이려고 작정했군.”

추태감이나 상만천 양쪽의 의중에 대해 중의만큼 세세히 알고 있는 인물이 없다. 중의가 불편한 듯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성곤이 물었다.

“자네는 그 놈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나?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던데….”

“나도 잘 모르네. 그저 만보적의 신변 호위라고 들었을 뿐이네.”

그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지나치는 말투로 대답을 하자 성곤은 그 놈들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중의가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기 꺼려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굳이 자신이 캐물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놈들뿐 아니라 추태감과 청문 일행도 관을 하나씩 메고 들어왔다는 점이네. 그 흑백인가 하는 놈들을 포함해 오늘 들어온 자들이 한결같이 관을 하나씩 메고 들어온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괜히 기분이 나쁘더군.”

관을 왜 메고 들어왔을까? 옥청문이라면 자신의 형을 위한 호화로운 관을 준비했을 수도 있었다. 추태감은 왜 관을 가져왔을까? 역시 신태감의 시신을 거두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상만천은 왜 흑백쌍용에게 관을 가지고 들어오라 했을까? 혹시 용추라도 죽은 것일까? 허나 용추는 죽을 정도가 아니었고, 자신이 치료한 이상 오늘부터는 조금씩 거동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지방마다 상례(喪禮)가 다른 법이네.”

중의가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며 의자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상 쪽으로 다가가자 성곤이 급히 말했다.

“빨리 청룡각으로 가보게. 추태감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자네부터 찾았다네. 자네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자네를 찾아내라고 지금 난리법석을 치는 것 같으이….”

그럴 만도 할 것이었다. 추산관 태감이 믿고 있던 철담이 죽은 상황에서 운중보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중의마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무슨 변을 당한 것이 아니가 생각할 터였다.

허나 중의는 지금 청룡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니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몸이 지쳐있는 상태라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갑자기 새벽부터 찾아온 능효봉의 존재와 설중행에 대한 생각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의 존재를 함부로 발설하였다가는 능효봉 역시 자신에 대한 내용을 묻어버리지는 않을 터였다.

“몹시 피곤하네… 조금 쉬어야겠네.”

중의는 정말 지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설중행을 치료하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더구나 매우 힘든 일이었다. 구양단(九陽丹)은 그저 복용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그 약효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영약이 아니었다. 물론 먹지 않은 것보다 기력이 충만해지고 기혈이 튼튼해지는 효과는 어느 것보다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진품의 용정차(龍井茶)를 세숫물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꼴이었다.

“추태감의 성품이 어떻다는 것쯤은 자네가 더 잘 알 것 아닌가?”

지금도 운중보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상황에서 중의가 빨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운중에게 빨리 찾아내라고 재촉하는 상황에서 점점 곤란해지는 것은 아랫사람들일 터였다.

“어차피 추태감이 들어온 이상 언제든 만날 수 있네. 미안하지만 자네가 아이를 시켜 내가 쉬고 있다고 전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가겠다고 전해주게.”

웬만하면 자신도 찾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설중행에게 가한 금제를 푸는 것도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고, 기혈이 막혀있는 상태에서 구양단을 복용시킨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었다.

금제를 풀고 기혈을 안정시키는 데에만 거의 한 시진이 걸렸다. 그리고 구양단을 복용시키고 백팔 개의 금침(金針)으로 시술을 하며 설중행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성질이 다른 두 가지 기를 융합시키는데 두 시진으로는 너무나 촉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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