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산중신곡' 원문. 우리 한글문학의 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녹우당
그런데 이 규한록이 쓰여 지게 된 배경을 보면 조선후기 해남윤씨가의 쇠락해가는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한 나라도 흥망성쇠가 되풀이 된다. 한 가문의 흥망성쇠 또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왕조의 기운이 서서히 기울어 가듯 18세기 후반을 넘어 19세기에 접어들면 녹우당 해남윤씨 가문 또한 그 기운이 급격히 쇠락해 간다.
해남윤씨가 관련 기록을 보면 윤덕희의 아들인 윤종(尹悰, 1705~1757)에서부터 윤지정(持貞, 1731~1756), 윤종경(鐘慶, 1769~1810)에 이르는 동안 이들의 행적이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이들이 관직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집안의 종통이 잘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종가의 장손이 없을 경우 가까운 일가의 형제 중에서 입양을 통해 비교적 쉽게 대를 잇곤 하였으나 윤종 대부터는 계속되어 손이 잘 이어지지 않아 종가가 그 힘을 점점 잃어간다.
이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공재 윤두서의 손자인 윤종은 연안이씨 부인으로부터 아들을 하나 겨우 얻었다. 그런데 아들인 윤지정은 자식이 없자 작은 아버지 윤탁의 아들 규상의 첫째인 종경을 입양하여 대를 잇게 한다. 하지만 종경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3번째 부인인 양천허씨로부터 아들을 하나 겨우 얻는데 이가 곧 광호(光浩)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광호는 결혼하여 신행길의 처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죽고 만다. 모두 단명을 하거나 종손을 제대로 잇지 못해 거의 절손의 지경에 이른 때가 이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동안 잘 지켜온 재산도 이로 인해 일순간에 다 흩어져 버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광호는 이웃 고을인 강진 병마절도사(강진에 병영이 설치되었다)의 재산을 탐낸 매질로 인해 그 후유증에 죽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를 놓고 보면 몇 대에 걸쳐 관직(벼슬)에 진출하지 못하고 대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게 됨에 따라 이 당시의 해남윤씨가는 매우 쇠락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주변의 세도가들이 토지를 비롯 해남윤씨가의 재산을 탐내려 침탈을 시도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행도 하기 전에 남편과 사별한 기구한 여인